시 너머 시

오후의 지퍼들/배옥주

songpo 2015. 10. 29. 13:05

오후의 지퍼들

배옥주

지퍼를 열자 여자들이 쏟아진다

입 밖으로 뛰쳐나오는 수다들

아이들이 쏟아지고 남편들이 쏟아지고

루비똥이 쏟아지고 포르쉐가 쏟아지고

엘콘도파사 속으로 빨려가 회오리치는

수다들의 향연

왼쪽으로 저었다가 오른쪽으로 저었다가

도덕이 쏟아지고 애인이 쏟아지고

주상복합단지가 쏟아지고 콘도가 쏟아지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 ‘오후 3시’

나른한 평화가 쏟아진다

저마다 속내 하나씩 지퍼 안에 감추고

벌어진 지퍼를 닫을 줄 모르는 지퍼들

에스프레소를 삼키며 재개발이 쏟아지고

마키아토를 저으며 주식이 쏟아지고

창밖엔 지퍼를 열어

오늘의 갈매기들을 날려 보내는 수평선

원피스 속, 어제보다 뚱뚱해진 다리를 감춘 채

오후 3시의 지퍼를 열고

우아하게 걸어 나가는 지퍼들의 뒷굽

—시집『오후의 지퍼들』(201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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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는 ‘오후 3시’를 새로운 무엇을 시작하기엔 너무 늦고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고 했다. 그래서 애매하고 어정쩡하면서도 나른한 오후 3시 즈음은 농도가 조금 묽어진 햇살이 통유리를 부드럽게 통과하는 카페에서 카푸치노를 시켜놓고 거품을 천천히 저으며 홀짝거리기엔 아주 그만인 시간이다. 다리를 꼬고 앉아 만만한 친구와 수다 떨기에 딱 좋은 시간대인 것이다. 퍼지거나 혹은 팔짝 뛰고 싶은 유혹이 ‘온갖 수다의 향연’으로 대체된다.

오후의 태양이 알맞게 풀이 죽은 그 시간은 누군가를 사랑하기에도 적절치 않다. 무료함과 단조로움에 몸이 비틀리면서 식어가는 커피를 생각 없이 휘젓는 시간이다. ‘커피 한잔의 여유를 아는 품격 있는’ 시간과 ‘심장이 뜨거워지는’ 시간의 흐릿한 경계이며, 반전이 일어나기 다섯 걸음 직전의 시간이다. ‘루비똥’과 ‘포르쉐’와 ‘주상복합단지’와 ‘콘도미니엄’과 ‘재개발’딱지와 ‘주식’의 그래프가 열린 지퍼 속에서 뒤엉켜 쏟아져 나온다. 대수로울 것 없는 블라인드 수다들이 새어 나온다.

태양이 저만치 삐딱하게 기울면서 익을 대로 익은 중년의 여인들은 세상 좀 안다며 어떤 말이든 손해 볼 것 없고 나쁘지 않으리란 믿음아래 거침없는 수다는 계속된다. 열어놓은 지퍼의 넓은 문은 쉽사리 닫히지 않는다. 아이들 과외에서 남편의 승진문제까지 거들먹거리며 지혜로운 여자인 척하다가 신문에서 본 ‘내연녀와 짜고 아내 죽인 남편’에 비분강개하며 도덕으로 무장한 여자처럼 행세하다가는 돌연 친구의 ‘애인’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남자사람 친구'라도 괜찮다는 눈치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 '오후 3시'는 통유리 위로 나른한 평화가 쏟아진다.’ ‘저마다 속내 하나씩 지퍼 안에 감추고 벌어진 지퍼를 닫을 줄 모르는 지퍼들’로 오후3시는 조금 건조하지만 탱탱하고 건재하다. 원피스 속 스멀거리는 발칙한 욕망들이 복제되어 파다하게 퍼진다. 또 하루가 저물면 ‘어제보다 뚱뚱해진 욕망을 감춘 채’ 잿빛 혼돈 가득한 거리를 ‘우아하게 걸어 나가는 지퍼들의 뒷굽’ 그러나 묶었던 머리를 쉽사리 풀지는 못하는 여자들. 강남스타일이든 도도스타일이든.

권순진(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