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네 옛집-김송포
모래네 옛집
김송포
백 여년 만에 빈집을 들어 가 본다
마당 가운데 멍석 펴놓고 고추를 말리던 할머니의 허리가 구부정하였다. 정지 옆에 쫄쫄 흐르던 곳에 막대 집고 썰매 타던 아이는 미끄럼을 즐겼다. 세 들어 살던 소년의 장난기에 귀찮아 이사 가기를 소망하던 소녀가 서성기렸다 절룩거리며 쌀을 이고 나가 용돈을 마련하던 할아버지는 한량이었다. 돌확에 보리를 갈아 밥을 하며 할머니는 애꿎은 며느리만 나무랐다. 방랑을 일삼던 풍류는 간데없고 너른 마당에 풀밭만 무성하여 떠나 버린 옛날이 가고 없었다. 흙 천장이 무너질 듯 기울어 있다. 밥풀 붙인 정담을 잃지 않았을 가난이었지만 삼 대의 땅과 집을 두고 핏줄은 외지로 가고 없었다. 이미 큰 도시로 가 버린 빈집에 거미줄과 잔풀은 지붕을 넘어 고요를 가로질렀다. 가문의 흐름에 뿌리만 벌려 놓고 집은 쓰러지지 않은 채 장독대 빗물은 말라붙었다. 아궁이에 세운 봇돌이 들썩거렸다. 기웃거리다가 대나무를 흔들어보다가 거미줄 사이를 넘다가 헛간을 들여보다가 시계바늘이 고장 난 것처럼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바람이 한참을 놀고 간 것을 보았다
홍시
김송포
골목길 담 너머 빨간 등에 눈빛이 휘둥그레진다
어둠 안에서 반쯤 상기된 비비추가 불빛에서 살을 그을린다
푸른 가지에서 나와 봄을 굴리고
여름 나절 긴 밤을 달빛과 잔을 기울이다가
끈적한 길에 누르스름한 빛깔로 몸을 우려내고 있다
잎도 없이 꽃망울은 터지지 못하고
구멍 난 잎이 고개를 넘어갈 즈음
그늘 앞에서 입술이 달싹거린다
몸에 햇살을 보여 줘
푸석한 얼굴에 구름을 바르면 달착지근 해 질 거야
떨리는 음색으로 노래를 불러 줘
배롱나무껍질처럼 반질 해 질 거야
질 때 지더라도 밤새 떨며 호흡을 다 한 홍등가의 여인,
얼굴에 분을 칠하고 붉은 드레스 입고
유리 앞에 앉아
오늘밤,
너를 흔들어본다
돌, 돌, 돌의 사연
김송포
멈추어 있는 돌에 바퀴를 달았다
이름 없는 돌에 문패를 달아 내 무덤에 걸고 싶었다
산모롱이에 돌을 쌓아 햇볕 드는 숲으로 조금만 비켜 달라 빌어본다
길섶 사이에서 잠들고 싶다
강물 깊은 곳에 길 잃은 돌멩이가 모래 밑에 눌러져 시름시름 앓고 있다
어머니 가신 줄도 모르고 개구쟁이들은 비석치기 놀이에 쾌변을 놓은 것처럼 웃고 있다
섬에 정박한 어머니는 절벽에서 배고플까 굽어보고
낙석에 몸을 베인 그믐달이 쓸개 안에 박혀 있다
구르다 지쳐 깎인 돌이 나의 쓸개에서 굴러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