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너머 시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유희경

songpo 2016. 11. 22. 17:56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유희경

 

1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이 안은 비좁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식탁 위에 고지서가 몇 장 놓여 있다

어머니는 자신의 뒷모습을 설겆이하고 있는 것이다

한 쪽 부엌 벽에는 내가 장식되어 있다

플라타너스 잎맥이 쪼그라드는 아침

나는 나로부터 날카롭다 서너 토막이 난다

이런 것을 너덜거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2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면도를 하다가 그저께 베인 곳을 또 베었고

아무리 닦아도 몸에선 털이 자란다

타일은 오래 되면 사람의 색을 닮는구나

베란다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삼촌은

두꺼운 국어사전을 닮았다

얇은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다

뒷문이 지워졌다 당신이 찾아올 곳이 없어졌다

 

3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간밤 당신 꿈을 꾼 덕분에

가슴 바깥으로 비죽하게 간판이 하나 걸려진다

때 절은 마룻바닥에선 녹슨 못이 머리를 박는 소리

아버지를 한 벌의 수저와 묻었다

내가 토닥토닥 두들기는, 춥지 않은 당신의 무덤

먼지들의 하얀 뒤꿈치가 사각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