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너머 시

-김혜순 시집『피어라 돼지』

songpo 2017. 1. 8. 08:40

거꾸로 선 화엄세계

-김혜순 시집『피어라 돼지』

 

황현산 문학평론가·고려대 명예교수

 

 

 

지난 한 해의 결산은 아니지만, 그동안에 출간된 시집 가운데 아무리 자주 언급해도 지나칠 수 없고, 아무리 깊이 뜯어 읽어도 다 뜯어 읽기 어려운 시집을 몇 권 고르라면, 김혜순 시인이 햇볕 따뜻한 봄날에 발간했던 『피어라 돼지』가 빠질 수 없다. 날이 따뜻해서 땅이 풀리기보다는 발효부터 시작했던 날이라고 할까. 내 말이 괴이한가. 무엇보다도 이 시집은 우리가 여러 해 전에 산 채로 땅에 묻었던 수백만 마리 돼지에 바치는 만가로부터 시작하는데, 그 돼지들은 아직도 땅에 묻혀 있기에 하는 말이다.


시인은 구제역 파동으로 축산 농가들이 절망에 빠져 있던 2010년 어느 날 경기도 땅 어느 곳을 여행하다가 수만 마리 돼지가 한꺼번에 땅에 묻히는 것을 보았다. 마음에 충격이 커서 며칠간 잠을 이루지도 밥을 먹지도 못했지만 그 상처로 시를 쓸 수 있게 된 것은 수년이 지나서였다고 한다.

시집 전체 4부 가운데 제1부 ‘돼지라서 괜찮아’는 사실 그 제목으로 쓰인 시 한 편이다. 아니, 보통 길이의 시 열다섯 편이 줄줄이 이어져 한 편의 시가 되는 연시다. 돼지들은 이름이 없고, 얼굴이 없고, 눈 맞춰줄 눈이 없기에, 돼지 떼는 좁은 축사에 갇혀도 괜찮고, 오물 속에 드러누워도 괜찮고, 땅속에 산 채로 파묻혀도 괜찮다. 죽어도 괜찮다. 돼지라서 괜찮다.

 

구제역으로 땅에 묻힌 돼지를 통해 이 땅의 비참한 현실을 함께 아파해 온 김혜순 시인. [중앙포토]

구제역으로 땅에 묻힌 돼지를 통해 이 땅의 비참한 현실을 함께 아파해 온 김혜순 시인. [중앙포토]

 

 

그러나 괜찮은가. ‘나는 돼지인 줄 모르는 돼지예요/두통이라는 뚱보 여자예요/구토라는 뚱보 여자의 그림자예요/날개도 없는 검은 기름가방이에요/제 몸을 제가 파먹는 돼지예요/전 세계의 부처들이 돌아앉아 앓는 소리를 내고 있는 방/나는 겨드랑이에 털이 가득한 돌덩이에요’(‘돼지禪’). 돼지들이 돼지라서 학살을 당할 때, 모욕을 받는 것은 생명 그 자체다. 생명이 모욕이고, 살아 있음이 고통이고, 삶이 저주인 곳, 그곳이 지옥이다. 거기서는 기도도 참선도 부활도 해탈도, 어느 것 하나 지옥의 놀음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 시집은 하나의 지옥도, 뽐내면서 썩고, 큰소리치면서 죽어 가는 어떤 화엄세계, 거꾸로 된 화엄세계, 검은 화엄세계의 그림을 그린다.


우리 시의 가장 유명한 돼지는 김광균의 ‘사향도’에서 읽었던 ‘어두운 교실 검은 칠판’에 그려진 ‘날개 달린 돼지’였다. 그 돼지는 미욱함과 희망을 동시에 지닌 우리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날개 같은 것은 생심도 낼 수 없이 무참하게 죽어 가는 저 돼지들도 여실히 우리의 모습이다. 또다시 조류인플루엔자에 걸린 3000만 마리 닭과 오리를 땅에 파묻으면서, 법도 질서도 없이, 더러운 흙에 묻혀 땅을 일렁이고 악취를 품으며 썩어 가는 생명들처럼, 부패의 끝에 이른 권력의 상층부를 우리는 지금 바라보고 있다. 이름이 없기에 번호가 붙은, 번호로도 구별되지 않기에 아예 모든 돼지에 ‘돼지9’라는 번호를 붙인 시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당신’은 똑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고 끝난다. ‘돼지9 똥 위에 젖가슴을 대고 엎드린다.’ 한 번은 돼지들에게 하는 말이고 한 번은 우리에게 하는 말이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당신

김혜순

돼지들이 걸어온다

이 화창한 대낮에

이렇게 꽃 흐드러진 대낮에

돼지9 원피스돼지, 돼지9 투피스돼지, 돼지9 넥타이돼지 걸어온다

요리조리 엉덩이 흔들며 하이힐 콕콕 찍어대며

돼지9 길러서 먹어주세요

돼지9 먹고 울어주세요

돼지9 새끼도 낳아 드릴게요

돼지9 슬픈 인생이었다고 한 번만 말해주세요

돼지9 나를 잘 싸서 준비해주세요

돼지9 창자는 줄에 걸어주세요

돼지9 하나도 버리지 말아주세요

돼지9 트림은 그렇게 심하게 말아주세요

맛있는 걸 당신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아껴가며 살살 파먹어도 되나요?

당신은 돼지를 사랑했다

익숙하게 살집을 가르고 신문지에 싸서 검은 봉지에 담아 주었다

모두 이름이 같은 돼지

돼지들이 걸어온다

다 먹어 치웠는데 또 걸어온다

배가 불러 죽겠는데 또 걸어온다

돼지9 똥 위에 젖가슴을 대고 엎드린다

돼지9 똥 위에 젖가슴을 대고 엎드린다

 

 

황현산
1954년 목포 출생. 저서 『잘 표현된 불행』 『밤이 선생이다』. 대산문학상(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