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책방 /길상호
안개 책방 (외 1편)
길상호
숲 옆구리에서 책 하나를 꺼냈다
표지 안쪽에서 오래전 상형문자가 되어 날아간
직박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책등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자니
그것 또한 새가 남긴 책의 내용일 것 같아서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젖은 것도 같고 마른 것도 같은 소리는
오랫동안 앓던 환청이 도진 거라고
너는 나의 두 귀를 손으로 감싸 막았다
손금에서 풀려나온 안개가 축축하게 고막에 맺히자
그 책은 목소리를 잃고 잠잠해졌지만
나는 좀처럼 고요가 편해지지 않았다
죽은 나무들로 빽빽한 숲
이따금 삭은 가지의 문장이 바닥에 떨어지면
그때서야 조금 살아있는 기분이었다
소리도 없는 책은 도로 꽂아두고서
너는 숲의 비밀이 적힌 두루마리라며
나이테 한 올을 풀어 내게 쥐어주었다
첫 단어에 눈길이 닿는 순간
숲이 백지 같은 안개로 가득 채워졌다
아무것도 읽지 못한 입술이 얼어붙었다
⸻《시와 사람》 2017년 겨울호
먼 곳의 택배
가끔은 머나먼 생이 택배로 배송되어왔다
수명을 단축시킬 거라고 어머니는 반품을 강요했지만
주소지도 없는 그 박스가 나는 늘 궁금했다
에어캡으로 정성스레 싸놓은 건 대개
녹다 만 구름과 안개
눈이었는지 비였는지 모를 물방울 몇 개
왠지 슬퍼 보이는 비늘과 깃털
머나먼 그곳에도 우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택배를 열 때마다 안심이 되곤 하였다
배송 물품들을 늘어놓고 앉아 있으면
저녁은 모서리를 접은 채 평면이 되어 쌓이고
수레에 박스를 주워 싣는 할머니가
몇 생을 건너온 어머니는 아닐까 싶기도 했다
⸻《문학동네》 2017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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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호 / 1973년 충남 논산 출생. 2001년 〈한국일보〉신춘문예 당선. 시집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모르는 척』『눈의 심장을 받았네』『우리의 죄는 야옹』외, 사진에세이『한 사람을 건너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