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렌즈 /차주일
얼음렌즈 (外)
차주일
나는 꿈을 꾸고 해몽까지 하는 사람이지만
꿈은 내 능동이 아니지.
여러 등장인물로 한 편 이루어진 꿈은 피동.
원하든 그렇지 않든 구성되는
내 삶은 타자가 주인공이 되어 지나간 막간일 뿐.
능동과 피동이 동거하면
통념을 넘어서는 통설이 태어나지.
나 역시 미완성 각본 어디쯤에서
누군가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으리.
인류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눈송이를 모으고
빙산을 갈아 볼록렌즈를 만드는 사람이 있어,
햇빛을 모아 불씨 하나 길들이는 사람이 있어,
나는 잠깐 꿈밖으로 태어나
사랑을 세공하는 천직을 가졌으리.
내 수정체에 든 온갖 피사체로
너라는 한 점을 어렵사리 착상시키고
체온으로 그린 입체를 탁본하여
내 해몽대로 네 얼굴이 생겨났으리.
네가 오늘 사용할 내 표정을 고르기 때문에
내 배역은 사후에도 전생이리.
홀울음
한 노래를 밤새 듣는 것은 위험해.
반복이란 자기최면까지 허물고 돌진하는 침략자,
이것은 새 시대를 여는 호령 같은 게 아닐까.
밑이 뾰족해 모래밭에나 세워지던 빗살무늬토기가
밑이 편편해져 홀로 설 때
빗살무늬는 석기인과 함께 사라지고 없었지.
무문토기가 지능 높은 청동기인 것이란 게 이상해?
무문토기에 햇빛이 침략하고 있어
말라서 갈라지는 금이 무늬는 아닐까.
자연이 인공을 침략한 흔적,
이것은 인공을 합병하는
자연의 주문(呪文) 같은 게 아니었을까.
이렇게 자연의 식민이 되어
햇빛을 무늬로 처음 본 사람들
불에 태운 갑골문 방향을 따라 이동했다니,
울음이 만든 감정을 수없이 걸어낸 사람이
침략자의 식민이 되는 것도 독립이 아닐까.
홀로 우느라 처진 어깨를 인공이라 부르면
어깨를 다독여 세워 주는 타인은 자연이 아닐까.
꿈쩍 않던 소녀의 사지가 첫걸음으로 깨어져
움막으로 돌아가는 길이
얼굴에 새겨진 몇 갈래 무늬와 같다.
저 길 끝나는 곳에
밑이 편편한 최초의 제단이 놓여있을 것이다.
제 눈물을 문장으로 세워놓을 수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