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후의 「입술」 감상 / 김행숙
김경후의 「입술」 감상 / 김행숙
입술
김경후
입술은 온몸의 피가 몰린 절벽일 뿐
백만 겹 주름진 절벽일 뿐
그러나 나의 입술은 지느러미
네게 가는 말들로 백만 겹 주름진 지느러미
네게 닿고 싶다고
네게만 닿고 싶다고 이야기하지
내가 나의 입술만을 사랑하는 동안
노을 끝자락
강바닥에 끌리는 소리
네가 아니라
네게 가는 나의 말들만 사랑하는 동안
네게 닿지 못한 말들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소리
검은 수의 갈아입는
노을의 검은 숨소리
피가 말이 될 수 없을 때
입술은 온몸의 피가 몰린 절벽일 뿐
백만 겹 주름진 절벽일 뿐
⸺시집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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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지 않은 말로 인한 괴로움보다는 내가 한 말의 괴로움에 더 자주 시달린다. 정확하게 말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말이 놓이는 상황과 관계를 두루 헤아리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말은 관계이므로, 말을 헤아리는 것은 관계를 헤아리는 것이다. 생각이 깊어지면 말은 줄어든다. 제 내면의 동굴 속으로 아주 깊어진다면 면벽 수행(面壁修行) 중인 수도승의 것과 같은 마른 입술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를 향해 깊어지고 깊어진다면, 그 “입술은 온몸의 피가 몰린 절벽”, “백만 겹 주름진 절벽”과 같을 것이다. 아름다운 입술이다. 하지 못한 말의 괴로움이 극한에서 도달한 절경처럼 아름다운 이미지다. 그러나 이 절벽에서도 뛰쳐나오는 “네게 가는 말들로 백만 겹 주름진 지느러미”를 나는 막을 수 없으며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네게 가는 나의 말들”이 “네게 닿지 못한 말들”일지라도, “백만 겹 주름”진 영혼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김행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