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너머 시

창에 널린 이불/최정례

songpo 2020. 12. 20. 12:07

창에 널린 이불

 

 

아파트 창에 널린

햇살에 적나라한 솜이불

 

애국도 매국도 아닌

태극기도 일장기도 성조기도 아닌

목화솜 이불인지 폴리에스터 요깔개인지

이념도 아니고 사상도 아닌

우리의 생활

 

이미 비난받은

우리의 내부인 것 같은

 

내장을 꺼내

뒤집어놓은 것처럼

 

입 꾹 다문 일 가구의

내면을 햇살에 내어 말리고 있는

작은 창 가난한 방의

두툼한 저 무념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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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속옷, 속살에 닿는 물건. 정면으로 바라보면 미안한 생각마저 들게 하는, 늘 부끄러운 표정의 사물, 이불입니다. 좀처럼 노출이 불가한 물건인데 누군가 적나라하게도 이것을 작은 창에 내 널었습니다. 예리한 시선이 이것을 그냥 지나칠 리 없습니다. 국경일의 태극기나 걸려야 할 자리였으니 가히 생활의 국기라 불릴 만합니다. 애국이니 매국이니 떠드는, 소위 직업적 애국자들, 도덕주의자들에게는 불경할 풍경이기에 이미 비난받은/ 우리의 내부인 것 같은풍경이고 더 나아가 내장‘ ’뒤집어놓은 것같은 반항적 회화(繪畫)‘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생활은 국적 이전이고 이념 이전이고 정치 이전입니다. ’가난한 방앞의 두툼한 저 무념무상이 실은 심대한 사상의 풍경임을 이 예민한 시인이 제시합니다. 가만히, 자세히, 가까이 좀 보라는 뜻이지요.

 

장석남(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