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너머 시

노신 /김광균

songpo 2014. 6. 26. 17:08

노신(魯迅)

김광균

시(詩)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나

서른 먹은 사내가 하나 잠을 못 잔다.

먼 기적소리 처마를 스쳐가고

잠들은 아내와 어린 것의 베갯맡에

밤눈이 나려 쌓이나 보다.

무수한 손에 뺨을 얻어맞으며

항시 곤두박질해 온 생활의 노래

지나는 돌팔매에도 이제는 피곤하다.

먹고산다는 것,

너는 언제까지 나를 쫓아오느냐

등불을 켜고 일어나 앉는다.

담배를 피워 문다.

쓸쓸한 것이 오장을 씻어 나린다.

노신(魯迅)이여

이런 밤이면 그대가 생각난다.

온 세계가 눈물에 젖어 있는 밤

상해(上海) 호마로(胡馬路) 어느 뒷골목에서

쓸쓸히 앉아 지키던 등불

등불이 나에게 속삭거린다.

여기 하나의 상심(傷心)한 사람이 있다.

여기 하나의 굳세게 살아온 인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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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균(金光均 1914~1993) 황해도 개성 출생. ‘시인부락’동인으로 모더니즘 시 운동에 자극을 받아 “시는 하나의 회화(繪畵)다”라는 시론을 전개하면서 주지적·시각적인 시를 계속 발표하여 시단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고, 후진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시집에 『와사등』『기항지』『황혼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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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신(1881~1936)은 어린 시절엔 퍽 가깝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멀어져버렸다. 시골집 책장에 꽂혀있는 세계단편전집에서 몇 번이고 읽었던 「아큐정전阿Q正傳」은 나 스스로를 그 바보 같은 '아큐'와 혼동하게 했다. 뒤늦게 노신(魯迅)이 이 작가의 본명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원래는 주수인(周樹人)). 노신은 '느림과 빠름'이란 의미다. 그가 속도의 문제를 이름으로 삼은 것은, 사회변화의 문제는 옳고 그름 만큼이나 속도(완급)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담은 것이 아니었을까. 김광균은 노신의 삶에서 무엇을 읽었을까. 시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나. 서른 살 먹은 사내는 잠든 아내와 어린 것을 보며 담배를 문다. 쓸쓸하고 힘겨운 날에, 문득 상해의 뒷골목에 앉은 노신을 생각한다. 혁명에 좌절하고 다시 일어서서 새로운 세상을 모색했던 사람. 지금은 느림(魯)의 시절이니 조금 쉬어가자. 그러면 다시 빠름(迅)의 시절이 오지 않겠는가. 요즘 말로 하면 '좌절금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