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발표작..시론
반복되는 어둠을 딛고 일어선 아름다움에 대하여
― 김송포의 신작시 다섯 편에 대하여
김 태 선
회자정리라는 말이 있듯이 이 땅의 존재자들은 살아가면서 만나온 것들과 언젠가 헤어져야 할 운명을 지닌다. 다만 헤어짐의 시기가 제각기 다를 뿐이다.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 이를 새삼스럽게 말하는 것마저 구태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헤어짐을 겪는 이는 그 일이 반복될 때마다 아픔을 느낀다. 반복은 아픔을 무뎌지게 하는 힘이 있지만, 이상하게도 헤어짐에 의한 아픔은 무뎌지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타자와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이 본성으로 자리하기 때문이다. 그 본성에 상처를 내는 일은 마음 깊은 곳에 구멍을 남긴다.
다른 대상을 만나게 되더라도 헤어짐이라는 아픔에 의해 생겨난 구멍은 쉽게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구멍을 깊고 오랫동안 응시하는 시선은 그에 관해 독특한 변용을 이루어낸다. 함께 살펴볼 김송포의 신작시 다섯 편은 이처럼 주체의 마음 깊은 곳에 난 구멍을 응시하는 시선이 나타난다. 그 응시를 통해 독특한 정서의 변화가 일어난다.
어머니가 골목에서 소녀를 부른다. 그만 놀고 들어와. 밥 먹어야지. 종갓집 맏며느리의 곡소리가 담장 주름 사이로 흘러나온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진지 삼년상을 올린 가락이 휘어진다. 담벼락을 돌아 귀퉁이로 가면 애인은 부엉이 흉내를 낸다. 밤마다 소리는 창을 넘고 천변을 타고 자전거 바퀴를 따라가고
꽃과 새들이 음표를 달아 통과하는 도돌이표처럼 굽는 길
― [골목] 부분
[골목]의 첫 연에서는 “통인시장부터 벽 사이를 몇 바퀴 돌아도 그 자리다”라는 대목이 있다. 아마도 시의 주체는 서촌 일대를 몇 바퀴 돌아다녔으나 계속 같은 자리에 머무르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어지는 다른 구절을 살펴보면, 이는 삶의 한 모습을 그대로 옮기고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 세목은 이러하다. 화자는 “딱 저만큼의 높이로 갈라서 있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저만큼의 높이”란 “눈높이”를 가리킨다. 마음만 먹으면 넘어설 수도 있는 높이이지만, 쉽게 넘어가기 힘든 높이이기도 하다. 또한 “보일락 말락 아슬한 경계”의 높이이기도 하다.
화자는 “그리움은 그러니까 벽을 갖는 일이다”라고 한다. 그리운 이를 너무나 쉽게 만날 수 있다면, 이를 그리움이라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보일 것 같으면서도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보일 것만 같은 그런 틈이 그리워하는 주체와 그리움의 대상 사이에 놓여 있어야 한다. 이런 거리가 유지될 때에야 비로소 그리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움에 관해 노래하는 연에서 화자는 “가난을 모르던 골목길에 땅속 깊이” 거울을 묻어놓은 이야기를 쓴다. 이어서 “우물 속에 별도 은하도 허리를 꺾고 부르던 노래도 다 묻어놓았다”고도 한다. 눈에 보이고 소리로 들리는 것들이지만, 닿을 수 없는 것들이기에 그리운 것들이다. 그리운 것들을 묻는 행위는 닿을 수 없기에, 잊기 위해서였을까. 그러나
“밥을 짓던 불빛이 새어 나온다”고 한다. 묻어두고 싶어도 끝내 새어나오는 것들이 있다. 이는 밥을 먹이기 위해 “골목에서 소녀를” 부르는 어머니의 이야기로 옮겨간다. “종갓집 맏며느리의 곡소리가 담장 주름 사이로 흘러”나오는 이야기도 등장한다. 이어서 “할머니의 진지 삼년상을 올린 가락”이 등장하고, “부엉이 흉내를” 내는 애인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가운데에 벽이 있더라도, 그것이 눈을 가리더라도, 그 벽을 뚫고 나오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소리이다. “밤마다 소리는 창을 넘고 천변을 타고 자전거 바퀴를 따라가고”라는 대목이 등장하는 것처럼, 그리움을 묻어두고 싶어도, 그것은 소리를 타고 다시 되돌아온다.
심지는 꿋꿋하여 오래 버틴 자국이 의연하다
옆구리가 터져 바늘로 꿰맨 형상으로 수행하듯 물끄러미 있다
찬불가를 부르며
시계 초침처럼 하루도 쉬지 않고 바퀴를 돌렸을까
어지러운 듯
무릎이 반질거리는 시절로 가서 왕을 다시 추켜세울 수 있을까
― [등나무 의자왕] 부분
[등나무 의자왕]은 거실 한쪽에 놓인 오래된 등나무 의자에 관한 노래이다. 의자는 “이십칠 년 동안 주인을 받들었다”고 한다. 지친 이가 편히 쉴 수 있도록 “푹신한 치마폭처럼 받아주었다”고 한다. 오랜 시간 동안 주인을 위해 봉사하였을 것이기에 “기름기가 가실 때면 삐걱”거렸을 테지만, “풀을 먹여주면 다시 일어서곤 하였다”곤 한다. 그러나 시가 쓰인 시점에선 이미 수명이 다했을 것이다. “이젠/ 닳아진 연골처럼 액이 모자라/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비마다 위기를 맞는다”고 쓰여 있다. 이 대목에서 화자는 마치 의자를 두고 사람을 대하듯 노래한다. 화자는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지냈기에 의자에 정이 들었을 것이다.
시인이 등나무 의자의 임종이 가까워지는 순간을 묘사하는 대목은 참혹하다. “느슨해진 발목이 절룩거리고/ 등과 허리에선 비린내가 난다”고 쓰여 있다. 게다가 “터진 살갗 사이로 힘줄이” 보인다고도 한다. 그럼에도 화자는 “심지는 꿋꿋하여 오래 버틴 자국이 의연하다”고 칭송한다. 예찬의 태도는 시의 목소리인 주체보다 대상이 보다 높은 위치에 있을 때 나타난다. 어째서 시인은 의자를 왕이라 추켜세우는 것일까. 이는
“등나무 고목도 수십 년이 되면 드러눕는다는데” 거실에 놓인 등나무 의자는 그보다 긴 세월 동안 드러눕지 않고 강인하게 버티며 주인의 휴식처를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역할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수행자가 도를 닦는 모습에 견줄 수 있을 것이다.
시에서는 의자를 두고 “옆구리가 터져 바늘로 꿰맨 형상으로 수행하듯 물끄러미 있다”고 노래한다. 그러나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는 속언처럼, 쉬지 않고 일한 의자는 이제 “어지러운 듯”하다. 화자는 “무릎이 반질거리는 시절로 가서 왕을 다시 추켜세울 수 있을까”라고 묻지만, 이미 화자는 등나무 의자가 “돌아앉아 등을 긁적이다 사라질” 운명임을 알고 있다. 아마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그리고 살았던 모든 존재자가 같은 운명이었을 것이다.
물결치듯 군중 속으로 밀려 떠다니는 것이 밝은 곳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 것보다 낫다
어둠에서 빛을 찾아가는 안마사는 검은 안경 속으로 노란 보도블록을 두드리고 있다
― [검은 안경] 부분
[검은 안경]의 1연에 등장하는 안마사는 시각장애인으로 보인다. 안마사의 모습은 이어지는 “닳도록 보아야 할 사람을 잃고 까만 절망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일을 한다. “닳도록 보아야 할 사람을” 잃은 “절망의 기억”이 무엇인지는 시에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다만 4연에 등장하는 추모의 촛불이 그 기억과 관련이 있으리라는 암시만 있을 뿐이다.
2연과 3연은 안마사의 행적이 나타나 있다. 도시에서 길을 걸어본 사람이라면 보도 한 쪽에 노란색 보도블록이 깔려 있는 걸 본 일이 있을 것이다. 이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길의 행로를 표시하여 놓은 것이다. 노란색 보도블록엔 요철이 있어 시각장애인은 지팡이로 그것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블록이 있더라도 눈앞이 캄캄한 상태로 걷는 일은 불편할 것이다. 눈이 어두우면 그 앞에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므로 더디게 걸을 수밖에 없으리라. 이는 빠르게 걷고자 하는 행인들에게는 불편을 줄 수 있다. 때문에 시각장애인들은 “등 뒤에 싸늘한 사람들의 재촉”을 느끼곤 한다. 그런 느낌을 받을 때면, “재촉하면 할수록 발걸음은 먼지가 되어 길을” 잃곤 할 것이다.
그런데 화자는 “어둠에서는 응시하는 일이 많아지고”라고 한다. 보통 ‘응시’는 눈으로 어떤 대상을 집중하여 바라보는 일을 일컫는다. 시각장애인은 눈으로 밖을 볼 수 없기에 우리가 흔히 아는 맥락에서의 ‘응시’를 할 수 없다. 시각장애인이 행하는 응시란 어떤 모습을 일컫는 것일까. 아마도 마음속에서 어떤 일을 집중하여 떠올리는 일을 일컫는 것이리라. 때문에 “솟아오르는 해를 다독이”는 일을 하는 것일 터이다. 화자는 안마사가 “잊어야 할 것들 뒤로 한 채 밖으로는 지팡이를 견주고 살았다”고 쓴다.
4연에 이르면 화자가 어째서 시각장애인 안마사를 그토록 따라다니며 행적을 묘사하였는지, 그 이유가 드러난다. “터널에서 밝은 곳으로 환호 속에 어둠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굵은 손마디 위로하기 위해 촛불을 켠다”라는 대목이 등장한다. 촛불을 든 사람들은 “어둠을 추모”하기 위해 기꺼이 어둠 안으로 들어간 이들이다. 이들은 “위험한 행렬”이지만, 화자는 “물결치듯 군중 속으로 밀려 떠다니는 것이 밝은 곳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 것보다 낫다”고 한다. 눈앞의 밝음은 그 이면에 어둠을 딛고서야 가능한 것이다.
지워도 지워지지 않고 태워도 태워지지 않는 그 시절,
언제까지 밤에 머물 것인가 언제까지 객지를 떠돌아다닐 것인가
이름은 태양을 전전하다 명왕성까지 떠돌다 머물 것이라던
― [수첩여행] 부분
다소 상징과 같은 시어로 구성되어 있는 [수첩여행]은 과거의 기억들을 감추고 있다. 시의 첫 행은 “손을 뻗쳐 비밀의 다락방으로 들어 가 보니 밀알이 숨어 문을 잠가 놓고 있다”고 쓰여 있다. 아마도 오랜 시간 전에 쓴 수첩을 열어본 일을 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첩에 쓰인 내용은 과거의 화자가 남긴 것이므로, 현재의 화자는 “밀알이 숨어 문을 잠가 놓고 있다”는 말처럼 그 맥락에 온전히 가닿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어둠을 식히지 않았고 따뜻한 밥이 아랫목에서 숨을 고르고 있다”는 말처럼 수첩에 쓰인 맥락에서 완전히 멀어지지는 않은 듯하다. 시인은 밀알이 잠가 놓은 문을 열고자 한다.
“날개는 한 쪽 팔을 잃어”라는 대목은 아마도 어린 시절의 꿈이 꺾인 일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연을 마시다 잠이 든 연가도 흘러나온다”라는 대목에서는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대한 기억도 읽어낼 수 있다. “어미를 찾아 여행 떠나고 천장에 납작 엎드려 바닥에 웅크리고 잠을 자던” 시절에 대한 기록도 등장한다. “일수 집 아주머니”에 대한 기억도 있다. 수첩을 통한 과거로의 여행은 “물고를 떠나가서 강을” 헤엄치듯 움직인다. 이를 두고 화자는 “지워도 지워지지 않고 태워도 태워지지 않는 그 시절”이라고 한다.
화자의 유년 시절은 어둡고 아픈 느낌을 전해주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이를 두고 “언제까지 밤에 머물 것인가 언제까지 객지를 떠돌아다닐 것인가”라고 화자는 묻는다. 과거의 기억이지만, 화자에게 그 아픔은 쉽게 치유되지 않을 것만 같다. “이름은 태양을 전전하다 명왕성까지 떠돌다 머물 것이라던”이라 쓰인 마지막 행처럼, 화자는 자신이 사는 삶의 행로가 밝은 곳을 찾고자 하지만 끝내 어둠 속에서 맴돌고 있다고 말한다.
흙무덤 밀쳐 내고 봉긋하게 올라와 있는 장관을 봐
어미의 무덤에 벌써 꽃이 피었다고
저 아래 질긴 연의 고리를 끊을 수 있겠어
무수한 뿌리가 엉겨있어도 하나로 피어난 외줄 타기
구멍 사이로 숭숭 패인 어머니를 먹고 말았지
― [연밥 사이에서 피어난] 부분
[수첩여행]에서 모호하고 상징적으로 쓰인 자신의 삶에 대한 노래가 [연밥 사이에서 피어난]에선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언사로 들려온다. 화자는 “나는 가장 어두운 진흙에서 태어났어”라고 말한다. “보호받은 시절은 찬란했어”라는 대목은 그 이후의 시절이 매우 어두웠음을 반증한다. 바로 이어서 “나의 음침한 시절”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이 등장한다. 화자는 자신이 탄생하는 장면마저도 “탯줄은 이미 끊어지고 물갈퀴 저어 구멍 밖으로 나가려 했지”라는 거친 표현으로 묘사한다. 이어서
“나의 존재는 어머니 가시고 희미해지기 시작했어”라는 대목에서는, 화자가 어머니와 헤어지고 나서 많은 아픔을 겪었음을 짐작케 한다. 어머니의 상실은 연근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듯이 화자에겐 아픔으로, 그리고 결핍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과거의 아픔은 주체로 하여금 결핍을 느끼게 하지만, 이 결핍은 동시에 문학의 원천이기도 하다. 화자는 “결핍으로 구멍 난 글을 밥술에 퍼 올릴 때”라고 쓴다. “밥술”은 밥을 얹은 수저를 일컫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시의 제목에 쓰인 “연밥”을 연상케도 한다. “결핍으로 구멍 난 글”이라 하였지만, 이는 “까만 구덩이에서 황홀한 외침”을 하는 것과 같다. 두 행위 모두 아픔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아프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우산을 받쳐 주던 당신이 있어 통증은 가라앉기 시작했어”라고 한다. “당신”은 화자의 연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문학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화자의 아픔은 시를 통해 드러나고, 그러한 행위를 통해 아픔이 가라앉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은 아픔을 완전히 치유할 수 없다. 문학은 끊임없이 아픔을 표현하는 일을 반복하도록 추동한다. 화자 역시도 “아직도 발을 굴러야 하는 것 알아”라고 말한다.
문학은 아픔을 완전히 치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픔을 다른 모습으로 변용시키는 일을 할 수 있다. 이제 화자에게 아픔은 감추거나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화자는 “풀잎 사이로 진흙에서 울리는 아우성 들어 줄 수 있어”라고 말한다. 그리고 “흙무덤 밀쳐 내고 봉긋하게 올라와 있는 장관을 봐”라고 말한다. 연꽃은 “가장 어두운 진흙에서” 태어난다. 밟으면 발이 빠지는 깊은 수렁과도 같은 곳에서 가장 찬란한 아름다움을 빚어낸다. 아름다움의 토대는 “어미의 무덤”과 같은 어둠과 아픔이다. 그 아래에선 “무수한 뿌리가 엉겨”있다. 그러나 그 어둠을 딛고 연꽃은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아마도 시인이 자신의 아픔을 시로 드러내는 까닭은, 그 아픔을 딛고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일 것이다.
===김태선 201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당선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재학중.
--2014.애지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