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작..골목 외 4편
골목 외 4편
김 송 포
통인시장부터 벽 사이를 몇 바퀴 돌아도 그 자리다. 눈높이의 담벼락에서 안과 밖이 서로 넘나든다
딱 저만큼의 높이로 갈라서 있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그리움은 그러니까 벽을 갖는 일이다. 보일락 말락 아슬한 경계로 눈빛 오가는 일이다. 가난을 모르던 골목길에 땅속 깊이 나는 거울을 묻어놓았다. 우물 속에 별도 은하도 허리를 꺾고 부르던 노래도 다 묻어놓았다. 구들장 안의 정지에서 밥을 짓던 불빛이 새어 나온다
어머니가 골목에서 소녀를 부른다. 그만 놀고 들어와. 밥 먹어야지. 종갓집 맏며느리의 곡소리가 담장 주름 사이로 흘러나온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진지 삼년상을 올린 가락이 휘어진다. 담벼락을 돌아 귀퉁이로 가면 애인은 부엉이 흉내를 낸다. 밤마다 소리는 창을 넘고 천변을 타고 자전거 바퀴를 따라가고
꽃과 새들이 음표를 달아 통과하는 도돌이표처럼 굽는 길
등나무 의자왕
거실 한쪽에서
이십칠 년 동안 주인을 받들었다
이리저리 몸 돌리다가 지쳐서 궁둥이 앉힐 때
푹신한 치마폭처럼 받아주었다
기름기 가실 때면 삐걱거리며 울부짖다가
풀을 먹여주면 다시 일어서곤 하였다
이 십여 년 동안 이삿짐 차에 싣고 다니며 팔걸이가 되어주었다
옷을 세 번씩 갈아입히며 새것인 양 부려 먹었다
등나무 고목도 수십 년이 되면 드러눕는다는데
이젠
닳아진 연골처럼 액이 모자라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비마다 위기를 맞는다
뻣뻣한 목은 한쪽을 응시한 채 흐릿하고
느슨해진 발목이 절룩거리고
등과 허리에선 비린내가 난다
터진 살갗 사이로 힘줄이 보이긴 하나
심지는 꿋꿋하여 오래 버틴 자국이 의연하다
옆구리가 터져 바늘로 꿰맨 형상으로 수행하듯 물끄러미 있다
찬불가를 부르며
시계 초침처럼 하루도 쉬지 않고 바퀴를 돌렸을까
어지러운 듯
무릎이 반질거리는 시절로 가서 왕을 다시 추켜세울 수 있을까
무심히
돌아앉아 등을 긁적이다 사라질
검은 안경
안마사가 걸어가고 있다 잡으려고 따라가 보니 어둠에서 지폐를 까먹고 있다 닳도록 보아야 할 사람을 잃고 까만 절망의 기억을 끄집어낸다
아침에 햇살로 걸어 나와 울룩불룩 솟아 있는 노란 보도 위를 걷는다. 걷기 불편하다 주저하며 직각의 안내를 따라 열차의 곡선을 탄다. 철로를 쫓다가 멈추고 돌아본 것은 등 뒤의 싸늘한 사람들의 재촉이었다
재촉하면 할수록 발걸음은 먼지가 되어 길을 잃는다. 어둠에서는 응시하는 일이 많아지고 솟아오르는 해를 다독이며 잊어야 할 것들 뒤로 한 채 밖으로는 지팡이를 견주고 살았다
터널에서 밝은 곳으로 환호 속에 어둠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굵은 손마디 위로하기 위해 촛불을 켠다. 거리에서 촛불의 부르짖음은 위험한 행렬이다
물결치듯 군중 속으로 밀려 떠다니는 것이 밝은 곳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 것보다 낫다
어둠에서 빛을 찾아가는 안마사는 검은 안경 속으로 노란 보도블록을 두드리고 있다
수첩여행
손을 뻗쳐 비밀의 다락방으로 들어 가 보니 밀알이 숨어 문을 잠가 놓고 있다
어둠을 식히지 않았고 따뜻한 밥이 아랫목에서 숨을 고르고 있다
날개는 한쪽 팔을 잃어 심장 소리 나직이 들리고 사연을 마시다 잠이 든 연가도 흘러나온다
어미를 찾아 여행 떠나고 천장에 납작 엎드려 바닥에 웅크리고 잠을 자던 해안에서 숨을 쉰다
빛바랜 달력에 동그라미 치던 이자 날,
독촉하던 일수 집 아주머니 지금은 어디에 계실까
고양이가 발가락 물어뜯으며 핥던 신발은 주인을 잃고 집 안에서 흔적을 찾던 벽장 속에서 하품한다
기억은 물고 떠나가서 강을 헤엄친다
지워도 지워지지 않고 태워도 태워지지 않는 그 시절,
언제까지 밤에 머물 것인가 언제까지 객지를 떠돌아다닐 것인가
이름은 태양을 전전하다 명왕성까지 떠돌다 머물 것이라던
연밥 사이에서 피어난
나는 가장 어두운 진흙에서 태어났어
보호받은 시절은 찬란했어
나의 음침한 시절,
탯줄은 이미 끊어지고 물갈퀴 저어 구멍 밖으로 나가려 했지
나의 존재는 어머니 가시고 희미해지기 시작했어
햇발이 아래 게를 훑고 지나가면 몰랐던 아픔을 느끼곤 했지
결핍으로 구멍 난 글을 밥술에 퍼 올릴 때
까만 구덩이에서 황홀한 외침을 할 때
우산을 받쳐 주던 당신이 있어 통증은 가라앉기 시작했어
아직도 발을 굴러야 하는 것 알아
나의 정맥이 뛰고 있다는 것 만져 봐야 알겠어
풀잎 사이로 진흙에서 울리는 아우성 들어 줄 수 있어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질척이며 고인 물,
흙무덤 밀쳐 내고 봉긋하게 올라와 있는 장관을 봐
어미의 무덤에 벌써 꽃이 피었다고
저 아래 질긴 연의 고리를 끊을 수 있겠어
무수한 뿌리가 엉겨있어도 하나로 피어난 외줄 타기
구멍 사이로 숭숭 패인 어머니를 먹고 말았지
김송포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집게} ―현 ‘성남FM방송’ 진행.
===2014.애지 가을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