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의 파노라마 외 / 김송포
골목길의 파노라마
골목에서 도망쳤다. 작은 대문에 낮은 담벼락, 좁은 골목길에 이십여 년 살았다
골목을 떠나고 싶어 만난 지 두 달 만에 시집을 갔다. 골목이 밤마다 꿈에 보였다. 허리 구부리며 깨죽을 쑤어준 어머니, 안경 너머로 신문 보며
자식을 키우신 아버지, 이승으로 떠난 뒤 골목은 잊혀갔다
집 없는 아이처럼 바깥으로 돌다가 삼백 년이 지난 뒤 찾았다. 골목은
시절을 긁으며 장승처럼 지키고 있다. 문틈으로 보인 대문과 이 층 장독 난간에 녹이 슬고 화단에 수국만 웃고 있다. 골목 끝에선 집 떠난 처녀를
기다렸다 들어갈 수 없는 집, 돌아갈 수 없는 뿌리가 마당에 있다. 푸른 이끼가 군데군데 돋아 있다
골목에서 삼십 년을
어기적거리다가 영자 엄마를 만났다
거짓처럼,
묘지에서 걸어 나와 해당화 핀 자리에서 영자를 불렀다. 골목이 울었다
환호했다.
골목이 손을 내민다. 도주하듯 달아 난 처녀가 골목이 되어 골목을 기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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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러나오는 것
선암사에 가 보았건만 다가온 것은 아무것도 없네 아치형의 다리 하나 오래되었다는 것 외엔 별스런 것 없네 고목 몇 그루 검게
그을려 숨 가쁘게 목숨 부지한 것 외에 없네 딱 하나 와송 이라고, 누워있는 저것이 불상도 아니고 별을 보는 천문대도 아닌 것이 세상의 삐딱한
것을 보고 간섭하고 있네 어느 것 하나 성성하게 익어가는 것 되지 못한다 해도 너만은 삐뚜로 살지 말라네 나도 삐딱하게 뉴스도 보고 딴짓도 하고
껄렁거리고 싶은 데 소나무가 먼저 세상을 다 지고 누워서 착한 척, 얌전한 척, 바보인 척하지 말라 지적하네 나비도 아닌 것이 돌도 아닌 것이
세상 물정 모르는 나를 받치고 누워 땅을 받들라네 겸손을 받들라네 불상을 받들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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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의 멀미
날마다 담벼락 높은 집을 기웃거린 새가 있다
입을 오므리고 똥구멍을 들고 발톱으로 머리를 긁었다
뇌의 바퀴를
굴리며 헛발질한다
유리를 자주 찍으면 살이 부서질까
먹이라도 던져주면 창에 지직해 놓고 간다
미끼를 던져 놓은 주머니,
낱알 채우기에 여념이 없다
얕은 심지로 불을 밝히려 정수리에 기름을 부었다
거짓이 솟아나는가 하면 다시 혼탁해진 우물,
가다 지친 길에 쉼표를 찍고
계단식 탑에 힘을 빼고 걸어 본다
문밖에서 붓으로 그려진 집을 그윽하게 바라본다
손을
내밀어 보고
벽에 머리를 박는 일이 허다한 날들,
곰팡이 핀 골방에서
무릎보다 더 낮게 엎드려 바닥을 갈았다
바람과
바람 사이 퍼덕거리며 가던 새는
누추한 집에 비가 새는 줄 모르고 들락거려
토사를 하고
뱃속을 텅텅 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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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고흐가 내게로 온다
어둠에서 짖어대는 고요를 듣기 위해 내게로 온다
밀러의 대지의 노래와 랭보의 바람 부는 소리 ,골방에서 가난을 삼키는 소리, 먼 기적 같은 다듬이 소리, 칼로 천둥 가르는 소리,
햇빛이 창살 틈에 배어 나오는 소리, 문을 닫고 캔버스에 붓을 칠했다
당나귀를 사랑한 백석은 밤에 오지 않을까 낙타의 등을 타고
온다더니,
저 멀리 상여 메고 곡하는 어르신을 따르던 아이는 뱃속에서 밤낮으로 배를 찼다
지하철에서 동전 그릇 내미는
아저씨, 흘러내리는 젖을 빨아 먹는 아기, 어둠에 문이 닫힌 달팽이는 갈 곳 없어 물끄러미 나에게로 왔다
이 모든 웅얼거림을 닫아
편안하신가요
빈센트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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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해요, 무덤 씨
백 년 만에
찾았어 무덤이 등을 돌리고 있었어
앞만 보고 직진했어 거울만 보고 살았어 뼈도 살도 없는 당신 앞에 절하였어. 패인 풀이 일어났어.
무덤이 웃었어
몸을 긁적거릴 때 말이 들렸어. 먹으면 가렵고 찬바람 불면 붉어지고 운동하면 쓰러지곤 해. 칼바람은 살갗을
두드려. 붉은 피는 전투자세로 있어. 피부는 발정을 시작 해. 가을볕 타듯 몸에 양귀비꽃이 피어. 호흡이 가빠. 토하고 나면 땅이 보여, 혼자
걸어도 둘이 있어도 벌레는 몸 안에 파고들어. 고독한 홀씨가 기특해
부탁해요 무덤 씨, 따뜻한 물이라도 넣어줄까 얼굴에 선크림
듬뿍 발라드릴까
무덤 씨는 등 뒤를 지켜주는 잉걸불이잖아. 삼백 년이 지나도 절대 용서하지 마
-----시문학 2015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