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너머 시

자화상 /서정주

songpo 2015. 7. 10. 12:44

 

자화상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를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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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의 시인, 서정주가 스물세 살 중추에 쓴 자화상이다.

병든 수캐로서의 피와 본능과 운명을 격렬한 호흡으로 노래한 이 시는 언제 읽어도 목이 얼얼해지곤 한다.

“애비는 종이었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등 잘 알려진 시구 속에서 사금처럼 반짝이는 그의 시세계를 엿볼 수 있다.

2000년 12월 눈 많이 내리는 날, 그가 86세로 타계했을 때 이 시 「자화상」 속에서 그의 처절한 유언을 발견한 한 평론가의 시선은 참 탁월하다.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올해 그의 탄신 100주년이다. 식민지와 전쟁을 거쳐 온 시인의 상처와 죄와 비극적인 운명으로서의 「자화상」을 본다.

문정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