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유병록
발
유병록
지나간 고통은 얼마나 순한가
인간 하나쯤 아무렇지 않게 태우고 다니는 네발짐승 같다 말귀를 알아듣는 가축 같다
소리 없이
나를 태우고 밥집에도 가고 상점에도 들른다 달리거나 한곳에 오랫동안 서 있기도 한다
한참을 잊고 지내다
네 등을 올라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길들여진 고통은 얼마나 순종적인가
사나운 짐승의 시간은 이미 오래전의 일
네 발이 내 것 같다
말을 듣지 않고 날뛰는 시간도 있다
그러나 너를 껴안으면 떨어지지 않을 만큼만 위험한 길
참을 만한 시간이 참기 어려운 밤
발을 어루만진다
발가락을 하나씩 세어본다
내 발이 네 것 같다
너는 나를 태우고 또 어디론가 가려 한다
네 등은 따뜻하고
나는 그 커다랗고 우멍한 눈동자와 마주치는 일이 드물다
—《현대시》2015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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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록 시인의 「발」은 시 읽기의 순수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우선 “발”이라고 하는 하나의 대상을 몸에서 분리해, 그것을 살아 있는 주체처럼 풀어가는 상상 자체가 즐겁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감각적인 즐거움이 인간의 형상에 대한 흥미로운 반성을 가져온다는 점도 중요하다. 사실 주체와 몸은 분리되지 않는다. 주체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몸의 실존과 감각의 토대가 필요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몸과 주체를 등식화하는 이러한 논리 속에는 보이지 않는 위계가 존재해왔다. 가령 주체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손이 심장보다 중요한가? 이러한 생각의 기저에는 부분과 전체의 기계론적 위계화하는 유기체적인 상상이 개입되어 있다. 이러한 사고체계는 ‘나무’라는 표상구조로 비유되곤 한다. 나무는 나무라는 전체와 이를 구성하는 부분들(기둥, 뿌리, 줄기, 잔가지, 잎 등)이 존재한다. 나무라는 추상은 바로 이러한 부분들의 계열적 결합에 의해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 속에는 중심(나무)과 주변(가지)이라는 의미의 지정학이 암묵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유병록 시인이 생각하는/거부하는 의미의 체계이기도 하다.
기실 발은 존재의 의미(‘나’라는 주체)에 비하면 부차적이다. 발은 주체의 의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전체 몸을 떠받치지만 중심은 아니다. 몸을 구성하는 부분 또는 주변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유병록의 이 시는 바로 이러한 전체와 부분, 중심과 주변을 나누는 지정학적 상상 바깥에서 출발한다. 발은 순한 “짐승” 같고 “가축” 같다. 나는 발의 주인이다. 고통에 길들여진 너는 순하고 순종적이다. 그러나 어느 날 너를 만지다가 깨닫는다. (그것은 특별한 계기 없이 직관적인 깨달음이다.) 나를 어딘가로 데려간 것은 내가 아니라 너였으며 네 등을 타고 내가 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발은 하나의 몸이자 하나의 정신이다. 나라는 유기체를 구성하는 부분(신체 없는 기관)인 동시에 나를 넘어선 존재(기관 없는 신체)다. “너는 나를 태우고 또 어디론가 가려 한다.”
하나의 삶을 길로 비유할 수 있다면, 그래서 우리 모두가 결국은 어딘가로 떠나고 있는 유목민이라면, 짐승과 가축은 언제나 그렇듯 삶 전체를 의미한다. 가축이 있으므로 유목민은 새로운 목초지를 꿈꾼다. 존재에 대해 발이 그러하다.
신진숙 (문학평론가, 경희대 국제지역연구원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