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골/유홍준
遺骨(유골)
유홍준
당신의 집은
무덤과 가깝습니까
요즘은 무슨 약을 먹고 계십니까
무덤에서 무덤으로
산책을 하고 있습니까
저도 웅크리면 무덤, 무덤이 됩니까
무덤 위에 올라가 望(망)을 보았습니까
祭床(제상) 위에 밥을 차려놓고
먹습니까
저는 글을 쓰면 碑文(비문)만 씁니다
저는 글을 읽으면 祝文(축문)만 읽습니다
짐승을 수도 없이 죽인 사람의 눈빛, 그 눈빛으로 읽습니다
무덤 파헤치고 유골 수습하는 사람의 손길은 조심스럽습니다
그는 잘 꿰맞추는 사람이지요
그는 살 없이,
내장 없이, 눈 없이
사람을 완성하는 사람이지요
그는 무덤 속 유골을 끄집어내어 맞추는 사람입니다
저는 그 사람이 맞추어놓은 유골
유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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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53)의 시는 초기부터 줄곧 죽음과 동행해왔다. ‘유골’에서처럼, 그에게 살아간다는 것은 ‘무덤에서 무덤으로 산책’하는 일이며, ‘제상 위에 밥을 차려놓고 먹’는 일이다. 그러니 글을 쓰면 ‘제문’만 쓰고, 글을 읽으면 ‘축문’만 읽는 것이다. 시는 죽음의 형식으로서 일종의 제문이자 축문이라는 것을 이보다 더 간명하게 압축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는 전생에 도부(屠夫)나 장의사가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축생과 인생의 숱한 죽음에 대해 어떻게 그토록 친숙하고 정성스러울 수 있을까.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내장을 분리해내는 일등 도부’(‘도부’)나 ‘무덤 속 유골을 끄집어내어 맞추는 사람’(‘유골’)처럼 말이다. 그는 ‘살 없이, / 내장 없이, 눈 없이 / 사람을 완성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사라진 존재들을 잘 수습하고 형상을 부여해주는 자가 바로 시인이다.
그가 죽음에 들린 몸과 영혼으로 시를 왕성하게 쓸 수 있었던 비결은 삶과 죽음에 대한 남다른 셈법 덕분일 것이다. 그의 시에서 삶은 정육점에 걸린 고깃덩어리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반면 죽은 존재들은 살아 있을 때보다 더 강렬한 냄새를 내뿜으며 삶을 부추긴다. 그래서 모든 존재의 무게는 주검의 저울 위에 올려보아야 알 수 있고, 풍경도 무덤 위에서 볼 때 더 잘 보인다.
그는 김언희 시인의 표현처럼 ‘직방인(直放人)’으로서 살고 써왔다. 그의 시는 에둘러가거나 정교한 수사에 기대지 않는다. 추상적 언술보다는 일상의 발견에, 지적 통어력보다는 몸의 본능과 직감에 의지해 언어를 찾아간다. 그러다가 날렵한 손끝으로 시적 대상의 살과 뼈와 내장의 미세한 경계를 가로지르며 ‘붉은 고기’ 한 점을 쑥, 내민다. 주검에서 막 발라낸 그 살점에는 아직 핏기가 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