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체질
이수익
내 조상은 뜨겁고 부신
태양체질이 아니었다. 내 조상은
뒤안처럼 아늑하고
조용한
달의 숭배자이다
그는 달빛그림자를 밟고 뛰어 놀았으며
밝은 달빛 머리에 받아 글을 읽고
자라서는, 먼 장터에서
달빛과 더불어 집으로 돌아왔다.
낮은
이 포근한 그리움
이 크나큰 기쁨과 만나는
힘겨운 과정일 뿐이다
일생이 달의 자양 속에
갇히기를 원했던 내 조상의 닽빛 체질은
지금
내 몸 안에 피가 되어 돌고 있다
밤하늘에 떠오르는 달만 보면
왠지 가슴이 멍해져서
끝없이 야행의 길을 더듬고 싶은 나는
아, 그것은 모태의 태반처럼 멀리서도
나를 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보이지 않는 인력이 바닷물을 끌듯이
—시집 『꽃나무 아래의 키스』(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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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체질이니 태양체질이니 하는 말은 한의학에서의 음인과 양인으로 체질을 구분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음인체질은 대체로 몸이 찬 편이고 추위를 많이 타며 맥박이 약하고 느리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소화가 잘 안되는데다가 얼굴이 창백하고 정적인 활동을 좋아하며 얌전한 성격의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당연히 달빛체질은 태양이 작열하는 낮보다 밤의 달빛이 좋고 그늘을 좋아하는 야행성의 특질을 갖고 있다. 이런 체질은 달빛이나 어둠이 오히려 편안하고 익숙하여 몸에 맞는 사람들이다. 밤에 움직여야 기혈이 뚫리면서 생기가 돈다. 뒷장과 이면의 것, 앞서가기 보다는 뒤에서 서성거리는 뒤란의 체질이다.
다 그런 건 물론 아니지만 시인이란 근원적으로 달빛체질에 가깝겠다. 영락없이 이수익 시인의 이미지와도 빼다 박았다. 달의 특성은 또한 여성성에 있다. 태양이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남성성이라면 달은 땅으로 착 가라앉는 여성성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인력이 바닷물을 끌’며 지배할 정도로 달빛은 은근히 강력하다.
달의 주기적 변화는 농부들에게도 중대한 관심사다. 대지의 곡물과 땅에 사는 것들은 햇빛뿐 아니라 밤새 차갑고 은은한 달빛을 먹어야만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대개의 인간은 달빛과 함께 잉태되었고 달의 기운을 받아 태어났기에 달은 ‘모태의 태반처럼’ 우리를 끌어당긴다.
그러나 양인이든 음인이든 사람은 태양만 쬐고 살지 못하며 달빛에만 의존해 살 수도 없다. 그래서 선탠이 필요하듯 문탠도 필요한 것이다. 몇 해 전부터 부산 해운대구는 면역력 강화와 생리작용에 좋다는 달빛을 상품화하였다. 달맞이언덕 산책길에 달빛을 듬뿍 받으며 걷는 '문탠로드’를 만들어 관광객을 끌겠다는 의도였다. 월광 반사경을 설치해 관절염, 우울증, 암환자들을 유치하는 미국 애리조나 주를 벤치마킹했다.
그 무렵 달빛산책은 유행처럼 번졌다. 경주 남산에, 문경새재 옛 과거 길에, 영덕 동해안에서도 달빛을 관광상품화 했다. 특정 지역과 장소에 천혜를 베풀기야 할까만 '메밀꽃 필 무렵'의 봉평 달빛은 상상으로도 흐뭇하고 숨이 막힌다. 그리고 내가 사는 아파트 14층 베란다에서 올려다보는 달빛의 품질도 썩 괜찮은 편이다. 오늘밤은 천하없어도 저 달과 독대하며 딱 5분간만 바라다볼 작정이다.
권순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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