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자의 「시 안 쓰는 시인들」감상 / 김기택
시 안 쓰는 시인들
김해자 (1961~ )
무의도 섬마을에서 문학교실을 하는데, 갯벌에서 박하지 잡다 오고 산밭에서 도라지 캐다 오고 당산에서 벌초하다 오고 연필 대신 약통 메고 긴 지팡이 짚고 왔습니다
저 고개 너머, 자월도 살던 대님이라고 있어
키가 작달막하고 얼굴 모냥 갸름한 게 여자는 여자여
내가 죽으면 어느 누가 우나
산신령 까마구 드시게 울지요
일본 말루다 그렇게 슬픈 노랠 했어
첩으로 살다 아이 하나 낳구는
덕적도로 시집가 죽었어
공중에 펼쳐진 넓디넓은 종이에 한 자 한 자 새겨지는 까막눈이 시 속으로 대님이가 까악까악 날아왔습니다 이 땅에 시 안 쓰는 시인 참 많습니다 명녀 아지 은심이 숙희 승분이 경애 춘자 상월이 이쁜이, 시보다 더 시 같은 생애 지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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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교실로 수십 권의 소설이 담긴 인생이 걸어온다. 절절한 시 수백 편이 담긴 가슴이 온다. 이렇게 뛰어난 작품이 있는데 왜 문학공부를 하러 온단 말인가. 그 소설과 시는 글이 되어 몸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말들이기 때문이다. 두근거리는 심장과 끓는 내면과 눈물과 웃음 안에 갇혀 살도록 운명 지어진 글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의도 섬마을 까막눈들이야말로 글 쓸 줄 모르는 대시인들이요, 씌어지지 않은 그들의 작품이야말로 세상의 언어를 입지 못한 명시 아닌가.
오규원 시인은 살아 있는 시를 읽기 위해 책상과 시집과 작시법을 버리고 ‘버스 정거장’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물었다. ‘노점의 빈 의자를 그냥/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노점을 지키는 저 여자를/ 버스를 타려고 뛰는 저 남자의/ 엉덩이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글로 쓴 시보다 언어가 되기 이전의 사물이나 존재가 삶과 인간과 세상을 훨씬 생생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보다 더 시 같은 생애 지천”이니, 표정과 주름과 말 속에 숨어 있는 그 작품에 귀 기울여보자. 말이 되지 못해서 오히려 더 생생하게 살아 있는 책 밖의 세상을 읽어보자.
김기택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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