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동네 시인선〉 061. 2008년 시집 『집게』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2013년 『시문학』으로 등단한 김송포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결핍의 자각에서 시작되는 김송포의 언어는, 자신이 ‘전 존재’가 아니라 ‘부분적 존재’임을 본능적으로 의식하는 데서부터 그 의미의 중심을 확장하고 있다. 자신에게서 떨어져나간 나머지 반쪽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존재는 늘 결핍이다. 말하자면 그의 시는 “사라진 반달”, “반만 비추고 돌아선 곡절”에 대한 기억이고, 사라진 반쪽을 찾아 ‘현존’으로 회귀하려는 욕망의 기록인 것이다. 김송포의 언어는 사라진 근원과 그것을 메우는 ‘이마고’들, 그래도 닿지 못하는 실재, 그리하여 근본적으로 허무인 세계, 그리고 이 모든 경계를 머무는 에로스적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세계에 다양한 이마고의 실패를 끊임없이 던지고 당기면서 “없다”, “있다”를 반복한다. 그리고 이 시적 ‘포르트-다(fort_da)’는 허무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 에로스의 연기(緣起)에 다름 아니다.
포르트_다(fort_da), 부재를 견디기
I.
김송포의 언어는 결핍의 자각에서 시작된다. 그는 자신이 전(全) 존재(whole being)가 아니라 부분적 존재(partial being)임을 본능적으로 의식하고 있다. 자신에게서 떨어져나간 나머지 반쪽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존재는 늘 결핍이다. 말하자면 그의 시는 “사라진 반달”, “반만 비추고 돌아선 곡절”(「곡절」)에 대한 기억이고, 사라진 반쪽을 찾아 현존(現存ㆍpresence)으로 회귀하려는 욕망의 기록이다. 프로이트(S. Freud)의 어린 손자는 어머니와의 결별의 고통을 견디기 위해 ‘포르트-다(fort-da)’라는 놀이에 몰두한다. 그는 실패를 던지며 “포르트”라고 외침으로써 어머니의 부재(“없음”)를 확인하고, 다시 실패를 잡아당기며 “다”라고 외치는데 이것은 사라진 어머니가 다시 돌아와“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이는 어머니를 상징하는 실패를 던지고 당기면서 상실의 아픔을 놀이로 승화시킨다. 아이는 이 놀이를 통해 어머니라는 대타자(the Other)의 부재를 견뎌내며, 버려진 아이라는 소극적 주체에서 존재를 호출하는 능동적 주체로 다시 태어난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이런 의미에서의 김송포식 ‘포르트-다’이고, 그에게 있어서 사라진 대타자 역시 어머니로 상징화되어 있다.
나는 가장 어두운 진흙에서 태어났어
보호받은 시절은 찬란했어
나의 음침한 시절,
탯줄은 이미 끊어지고 물갈퀴 저어 구멍 밖으로 나가려 했지
나의 존재는 어머니 가시고 희미해지기 시작했어
-「연밥 사이에서 피어난」 부분
여기에서 “보호받은 시절”은 어머니와의 분리가 일어나기 이전의 시기, 즉 주체가 대타자와 완전히 통합되어 있는 행복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탯줄이 끊어지면서 주체는 서서히 결핍의 존재가 되어간다. 어머니가 가시고 나서 “나의 존재”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어머니의 사라짐으로 인하여 ‘전 존재’의 상태가 ‘부분적’ 존재, 즉 결핍의 상태로 변이되었음을 나타낸다. 김송포의 시에 등장하는 “뿌리”, “아궁이”, “집” 등의 단어들은 존재의 ‘기원(起源)’을 나타내는 시니피앙들이며, 그의 언어는 이 근원을 찾아 헤매는 오디세이아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타자 어머니는 마치 라캉(J. Lacan)의 실재계(the Real)처럼 이제는 닿을 수 없는 존재이다.
가서 쓰다듬을 수도 없다 살랑거리는 냄새 맡을 뿐,
고요히 숨죽여 우는 딸의 소리 들리는지
(…)
어미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회룡포 풀등」 부분
또한 대타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주체를 영원한 결핍과 불안과 갈망의 상태로 만든다.
그저 뿌리 없는 너의 발을 만지는 것처럼 조바심이 났다
-「궁전의 미아」 부분
뿌리를 만지작거리며 잠을 설친다
-「분홍색 잇몸은 이와 사랑을」 부분
열쇠는 문을 잃고 구멍을 잃고 어미를 잃고 어디에서 헤매고 있을까
-「열쇠」 부분
집 없는 아이처럼 바깥으로 돌다가
(…)
돌아갈 수 없는 뿌리가 마당에 있다
-「골목길의 파노라마」 부분
인용한 구절들은 하나같이 뿌리를 잃은 자의 불안을 보여준다. 마지막 인용구의 “돌아갈 수 없는 뿌리”라는 구절은 (한걸음 더 나아가) 현재의 결핍이 회복 불가능하며, 따라서 온전한 현존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II.
결핍이 근원적이고 그래서 충족 불가능한 것일 때, 그것은 어떤 길로 가는가. 하나는 충족을 포기하고 결핍을 더 큰 결핍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죽음충동’이라고 불렀던 이런 경향은 존재의 생명성을 비워냄으로써 관계의 완전한 파괴, 즉 무기물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하나는 불충족을 인정하지 않고 대타자를 그리워하며 그것과의 합일상태를 어떤 식으로든 계속해서 추구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의해 ‘에로스’라 불렸던 이 욕망은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의 결핍된 부분을 메꾸어 나간다. 김송포의 화자들은 에로스를 선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욕망의 언어를 향해 있는데, 그가 사라져 오지 않는 존재를 만나는 한 방법은 판타지를 경유하는 것이다. 다음은 그런 예이다.
엄마가 아궁이에서 살아 돌아오셨다
(…)
저 빛나는 아궁이에서 활활 타며 춤을 주신 것을
제삿날, 허리 구부리고 아궁이 속에 다시 몸을 실었다
엄마는 타는 것이 즐거운 듯 웃고 계셨다
-「기일」 부분
기일을 맞이하여 시적 화자가 만난 어머니는 존재의 기원적 공간이라 할 “아궁이”에서 “활활 타며” 현존의 완벽한 환희상태를 보여준다. 판타지(혹은 꿈)는 이런 점에서 ‘소망의 상상적 충족’이다. 이 시 속의 화자는 마치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실제의 자신으로 착각하는 ‘상상계(the Imaginary)’의 어린아이처럼, 순간적이지만 사라진 어머니와의 행복한 조우를 보여준다.
판타지를 경유하여 사라진 대타자를 다시 불러내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대타자와의 대면이 불가능할 때 에로스의 화자는 상실한 대타자를 대신할 수 있는 일종의 대리물을 찾는데, 라캉은 그것을 “소문자 대상 a(object little a)”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a”는 타자(other)를 뜻하는 불어 “오트르(autre)”이다. 결핍의 주체는 대문자 타자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대상들을 찾음으로써 상실의 고통을 견뎌낸다. 그러므로 우리가 “엄마의 젖을 더듬듯이 툇마루에 앉아 밤하늘 만진다”(「팔작지붕, 그늘」)와 같은 대목을 만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여기에서 “밤하늘”은 “엄마의 젖”이라는 대타자를 대신하는 소문자 대상 a이다.
III.
이 시집에는 엄마라는 궁극적인 대타자를 대신하는 무수한 소문자 대상 a들이 등장한다. 말하자면 김송포는 에로스의 시인이라는 것인데, 그는 돌아서 홀로 있기보다 관계를 향해 계속 나아간다.
우린 정녕 만나서는 안 되는 활화산인 걸 모르니? 뜨거운 산에서 차가운 골짜기로 넘어가는 순간 너는 나에게 뺨을 후려쳤어. 너와 내가 부딪혀 체위가 뜨거워지자 지나가던 눈발이 우리를 갈라놓았지. 웃옷을 벗고 홑겹만 걸치고 그간의 경로를 사진으로 보았지. 너의 입김이 몸을 녹이자 사방에 흩어져 있던 독이 전신에 퍼졌어. 가슴을 타고 배꼽을 지나 밑까지 너의 손길이 뜨거웠어. 살 속으로 번지는 너의 불길, 가라앉힐 때 되지 않았니? 내 안에 품고 가야 할 연민이라면 부풀어 올라도 참아야지. 열리지 않던 심장이라면 두드리지 말아야지. 그동안 엉켜 있던 너와 나의 폭발이 휴화산이길 빌어야지 왜 자꾸 불을 지르니?
-「한랭 두드러기를 만난 아침」 전문
이 시는“휴화산”(죽음본능)이 아니라 “활화산”(에로스)인 두 주체 사이의 만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왜 자꾸 불을 지르니?”라는 질문은 “우린 (…) 활화산”이라는 첫 행의 고백과 충돌한다. 질문과는 달리 화자는 이미 뜨거운 불길처럼 다른 소문자 대상 a와 하나가 됨으로써 사라진 대타자의 공백을 메운다. 「물방울여자」에서도 “폭포수처럼 달려드는 너의 질주를 받아들일 자신이 없어/처음 생경한 고백을 듣는 순간,/뿌리가 흔들렸어”라는 고백이 나오는데, 화자가 대상 a를 만나는 풍경은 이렇듯 종종 대타자인 “뿌리가 흔들”릴 정도의 격정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격정은 거꾸로 대타자를 상실한 고통의 깊이를 반영하는데, 결핍의 주체는 오로지 소문자 대상 a들을 대타자를 능가할 정도로 욕망함으로써만 상실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해서 대타자의 공백이 메꾸어지는가? 김송포는 대상 a를 찾는 수많은 노력들이 사실은 “오래된 그리움”(「그리움이 벽이다」)을 그리워하는 일이되, 그것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먼 거울상 단계에 대한 노스탤지어임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그리움은 그러니까 벽을 갖는 일이다 보일락 말락 아슬한 경계로 눈빛 오가는 일이다 가난을 모르던 골목길에 땅속 깊이 나는 거울을 묻어놓았다 우물 속에 별도 은하도 허리를 꺾고 부르던 노래도 다 묻어놓았다
-「그리움이 벽이다」 부분
여기에서 “가난을 모르던 골목길”은 대타자를 상실하기 이전의 완벽한 합일상태를 가리키며, 그“땅속 깊이” “거울을 묻어놓았다”는 것은 이 시의 화자가 철저하게 거울상 단계(상상계)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그 골목길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저기’를 그리워하는 일은 “벽을 갖는 일”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시들은 ‘저기’ 사라진(포르트) 대타자를 다시 ‘여기’존재(다) 쪽으로 불러내는 시적 ‘포르트-다’인 것이다. 그러나 ‘포르트-다’는 상징적 놀이이지 실재계를 실제로 불러내는 일과는 다른 것이다. “혈관에 피가 차 있어야 지나가는 달이 보인다는데/너는 가까워지다가 멀어졌어”(「주어와 술어의 관계」)라는 고백은 그 어떤 언어의 외교(外交)를 통해서도 궁극적인 실재에 도달할 수 없다는 고통스러운 진술에 다름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대타자(실재)는 오직 상상으로만 존재한다. 같은 시에 “영원은 거짓이고 관계는 과정일 뿐이다”라는 선언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영원”이란 결핍 부재의 현존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실현 불가능하므로 “거짓”이라 읽힐 수 있다. 그리하여 남는 것은 대타자를 대신하는 무수한 소문자 대상 a들과의 격렬한 “관계”뿐인 것이다.
IV.
우리는 다시 근원적인 질문으로 돌아온다. 과연 소문자 대상 a들은 대타자를 대신할 수 있을까. 그것은 대타자 상실의 고통을 온전히 보상할 수 있을까. 문제는 대체물은 대체물일 뿐이며, 따라서 그것을 찾는 행위 역시 항구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불가피하게도 부재의 공간이 “채워져 있어야 하고 부어야 하는 드라마는 끝이 있는가”(「초록의 빈병」)라는 질문에 도달한다. 그 드라마는 사실 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사라진 대타자는 그것의 부재성(不在性) 때문에 갈증의 영원한 진원으로 남을 뿐이다. “근원인 나의 샘이 말라 바스락거리는 낙엽소리를 낸다”(「물이 서럽다」)는 고백은 이 사실을 정확히 집어낸다. 화자는 거울상 단계의 어린아이처럼 소문자 대상 a들의 이마고에 집중하다가 그것이 오인(誤認ㆍmisrecognition)임을 알아채고, 회귀불능?“그대 다시는 고향에 못 돌아가리”(토머스 울프)의 유구한 정언명령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되면 언어지배의 상징계(the Symbolic) 안에서 대타자를 대신하는 소문자 대상 a들을 찾는 모든 노력들은‘허무’한 것이 된다. 화자가 (솔로몬처럼) “헛되고 헛되어서 헛되었다”라고 되뇌면서 “나는 허무와 허무 사이에 핀 씀바귀를 따서/허무의 그릇에 담아내었다”(「그릇의 허무」)고 쩔쩔매며 말할 때, 우리는 본질에서 멀어진 유적 인간의 보편적 좌절과 고독을 읽는다.
문제는 이 모든 인식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상상계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우리는 사라진 대타자-어머니를 그리워할 수밖에 없으며, 결핍을 견디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시적 ‘포르트-다’는 이것을 견디는 심미적 방식이다. 앞에서 시인은 그리움은 “벽을 갖는 일”이라고 했거니와, 그리운 대상을 만나는 일은 그 벽을 허무는 일이다.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시인은 수시로 죽음충동에 시달린다. 시인은 늘 에로스의 통로를 선택하지만, 사실 에로스는 죽음충동과 환유적으로 겹쳐 있다.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라.
화엄사 뒷간 가서 오줌을 갈기네 매화도 갈기고 목련도 갈기고 사랑도 갈기네 하지만 살아 있는 것은 본질뿐이라네 물 근처 철벅철벅 지퍼 열고 시원하게 내뿜는 적멸, 적멸이라니 기껏 절 뒷간에 앉아 풍경 소리나 더듬고 있다니 화엄에 오르면 화엄인가 적멸보다 화엄보다 뒷간 옆에 피는 꽃망울이 상좌승일 터
-「뒤깐」 부분
굳이 프로이트를 빌지 않더라도 배설은 죽음충동의 표현이다. 화자는 배설을 통해 모든 ‘경계’, 즉 벽들을 허물고자 한다. “오줌을 갈기네”라는 구절은 경계와 벽들에 대한 공격성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적멸”을 향해 있으므로 죽음충동이고, 죽음을 통해서만 상징계의 벽을 넘어 실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인식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보라, “살아 있는 것은 본질뿐”이라는 고백을. 그리고 바로 뒤를 이어 ‘현상’에 불과한 “뒷간 옆에 피는 꽃망울”을 ‘본질’인 화엄보다 “상좌승”이라고 말하는 것을. 이는 유일하게 살아 있는 것인 “본질”, 그리고 현상/본질의 모든 경계에 대한 조롱이고 공격이다. 본문의 “뒷간”을 제목에서 “뒤깐”의 된소리로 바꾸어 놓은 것도 이와 같은 정서를 반영한다. 같은 시의 후반부는 시적 ‘포르트-다’놀이가 보여주는 놀라운 에너지를 보여준다.
여보시게 봄 되면 얼음물 녹는다 하더니만 그간 참아온 화산은 어떻게 처리하였소 한바탕 자지러지게 피어날 산수유가 화냥으로 변하여 환장할 노릇이었을까 나무들이 내 오줌을 받아서 나무들에게 쏟더니 다시 사막으로 갠지스 강으로 뿜어 올리네
화자는 어느새 죽음충동을 넘어 “오줌”을 “나무”, “사막”, “갠지스 강”들을 연결시키는 강력한 에로스의 세계로 가 있다. 이 장대한 꿈은 “화냥으로 변하여 환장할 노릇”인 광기를 보여준다. 이 광기는 본질로 가는 모든 통로가 막혔으나 그것을 포기할 수 없는 영혼이 상징계에 내미는 도전장이다. 그리하여 이 시는 이 시집의 모든 미로와 방황과 목표를 응축해놓은 듯 장쾌한 에너지로 충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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