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호의 「풀칠을 한 종이봉투처럼」감상 / 이소연
풀칠을 한 종이봉투처럼
길상호(1973~ )
잘못 적어놓은 주소가
수취인도 없는 이곳에 나를 데려다 놓았다
수많은 밤 그렇게 도려내도
발뒤꿈치에 선명한 아버지의 필적,
세월이 올려놓은 우편료만큼
오늘도 상처 옆에 상처 하나를 더 붙이고
내가 뜯어볼 수 없는 내 속이
너무도 궁금해 반송하려 해도
아버지의 주소는 세상에 없다
—시집『우리의 죄는 야옹』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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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필적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풀칠한 종이봉투 위에 잘못 적어놓은 주소에서 연필 꾹꾹 눌러쓰는 아버지의 손가락을 생각한다. 누가 나를 수취인도 없는 곳에 데려다 놓았나. 아버지의 존재는 발뒤꿈치의 굳은살처럼 아무리 도려내도 선명한 필적으로 남아 있다. 상처 입었던 날들, 상처를 꺼내고 싶었던 날들마저 봉투에 담겨 있으리라. 내가 뜯어볼 수 없는 것이 내 마음 하나뿐이겠는가. 아버지의 속내를 너무 늦게 알았다. 유산으로 남긴 글씨체와 작은 상처들이 담긴 봉투. 곱게 풀칠해져 있으니 뜯을 수가 없다. 아버지의 주소는 세상에 없다는 마지막 구절이 뜨겁고 붉다.
이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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