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류창고 (외 1편)
이수명
우리는 물류창고에서 만났지
창고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차려입고
느리고 섞이지 않는 말들을 하느라
호흡을 다 써버렸지
물건들은 널리 알려졌지
판매는 끊임없이 증가했지
창고 안에서 우리들은 어떤 물건들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갔다가 거기서
다시 다른 방향으로 갔다가
돌아오곤 했지 갔던 곳을
또 가기도 했어
무얼 끌어 내리려는 건 아니었어
그냥 담당자처럼 걸어 다녔지
바지 주머니엔 볼펜과 폰이 꽂혀 있었고
전화를 받느라 구석에 서 있곤 했는데
그런 땐 꼼짝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지
물건의 전개는 여러 모로 훌륭했는데
물건은 많은 종류가 있고 집합되어 있고
물건 찾는 방법을 몰라
닥치는 대로 물건에 손대는 우리의 전진도 훌륭하고
물류창고에서는 누구나 훌륭해 보였는데
창고를 빠져나가기 전에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누군가 울기 시작한다
누군가 토하기 시작한다
누군가 서서
등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누군가 제자리에서 왔다 갔다 하고
몇몇은 그러한 누군가들을 따라 하기 시작한다
대화는 건물 밖에서 해주시기 바랍니다
정숙이라 쓰여 있었고
그래도 한동안 우리는 웅성거렸는데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소란하기만 했는데
창고를 빠져나가기 전에 정숙을 떠올리고
누군가 입을 다물기 시작한다
누군가 그것을 따라 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조금씩 잠잠해지다가
더 계속 계속 잠잠해지다가
이윽고 우리는 어느 순간 완전히 잠잠해질 수 있었다
이디야 커피
몇 시쯤인지 알 수 없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하는데
길이 엉망이구나 나는 고개를 돌렸다.
흰 셔츠를 입은 남자가 이디야 커피 앞에서 자꾸 내 말 들려 내 말 들리냐구 하면서
폰에 대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과연 그의 말은 들렸는데 사람을 잘못 보았어 하는 말도 잘 들렸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하는데 날벌레들이
가로등을 엉망으로 망쳐놓았다.
한 늙은 여자가 바닥에 앉아 있었고 술에 취해
술을 더 가져오라고 했다.
그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당장 오라고 했다.
오늘은 더 걸을 수 없구나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하는데
몇 시쯤인지 알 수 없었다. 여자는 다시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모두들 죽음으로부터 다시 한번
튕겨 나와
무언가로 죽음을 내리치고 있었다.
밤새 싸놓은 짐 보따리들이 엉망이구나
흩어진 천 쪼가리들이 돌아다니며 엉망이구나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남은 셔츠들을 가지런히 개기 시작했다.
⸺시집 『물류창고』 (2018. 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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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명 / 1965년 서울 출생. 1994년 《작가세계》에 시로 등단. 2001년 《시와반시》에 평론 등단. 시집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왜가리는 왜가리 놀이를 한다』『붉은 담장의 커브』『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마치』 『물류창고』 등. 시론집 『횡단』. 비평집 『공습의 시대』『표면의 시학』, 번역서 『낭만주의』 『라캉』 『데리다』 『조이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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