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너머 시

이성복의 「서시(序詩)」 감상 / 채상우

songpo 2020. 5. 9. 11:16

이성복의 서시(序詩)감상 / 채상우

 

 

서시(序詩)

 

이성복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 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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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마음속에 그런 역전 하나씩 있을 것이다. 조치원이나 안동 혹은 태백쯤, 고즈넉하고 그러나 아무래도 낯선 역전 말이다. 그쯤의 "늦고 헐한 저녁"과 함께 이 시를 읽어 보라. 한없이 마음이 저밀 것이고 더없이 하염없을 것이다. 대체 이 시에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그런데 이 시는 왜 이처럼 우리를 속수무책이게 만드는 걸까. 필패를 적고 있기 때문이다. "맞은편 골목"의 당신은 결코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의 정처 없음은 어쩌면 이번 생 내내 지속될 것이다. 이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결국 이 시는 당신이 끝끝내 ''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는, ''로서는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불능에서 비롯하고 있다고. 그리고 이 어찌할 수 없음에도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가 바로 시다.

 

채상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