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너머 시

월부장수 / 김사인

songpo 2014. 5. 7. 19:05

월부 장수

 


  김사인(1956∼)

 

 



진눈깨비는 허천나게 쏟아지고

니미

욕만 나오고

어디로 갈까

평촌을 거쳐 옥동으로 가볼까

 


코흘리개 새끼들이 아슴아슴 눈앞에 밟혀오는데

즈어매는 이제쯤 돌아왔을지

 


빈 속에 들이부은 막걸리 몇 잔에

실없이 웃음만 헤퍼지누나

 


어디로 가서

몇 개 남은 밥솥을 마저 멕이나

 


바람은 바짓자락을 붙잡고 핑핑 울어쌓는데

저무는 길가에 철 놓친 수레국화 몇 송이

꺼츨하게 종아리 걷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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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눈깨비 허천나게 쏟아지는’ 어느 낯선 들녘에서 무거운 솥단지들을 짊어진 채, 길을 잡느라 망연히 서 있는 월부 장수라니, 빛바랜 옛날 사진처럼 아득한 풍경이다. 지금은 TV 홈쇼핑 채널이나 인터넷 쇼핑몰을 통해 쉽게 상품을 주문해서 배송 받지만, 팔 물건들을 갖고 다니며 가가호호 문을 두드리는 이들과의 거래가 흔하던 시절이 있었다.


  물자가 귀하던 시절, 솥단지 하나도 월부로 사는 처지의 가난한 사람이 많기도 했다. 그 가난한 이들이 거래 대상인 만큼 월부 장수들은 교통도 불편하고 곤궁한 고장을 주로 찾아들었을 테다. 얼마나 오래 집을 떠나 있었는지, ‘코흘리개 새끼들이 아슴아슴 눈에 밟힌다’. 밥이나 굶지 않고 사는지…. 아비는 아비대로 이렇게 솥을 팔러 다니고, 애들 엄마 역시 떠돌면서 물건을 파나 보다.


  주인공의 처량한 신세처럼 날씨도 ‘개떡 같다’. 욕이 나오고, ‘허천나게’ ‘꺼츨하게’ 등 사투리가 나오니 시가 확 생생해진다. 겨울이 머지않았는데 주인공은 옷도 허술하리라. 지난 추석에는 집에 다녀오셨는지…. 원조 기러기아빠인 월부 장수. 집이 그립지만 빈손으로 어찌 돌아가나. 식구들 먹여 살리자고 떠돌아다니는데, 제 한 입 해결도 힘들고 어쩌면 집에 돌아갈 차비도 없을 터. 그래도 끼니를 때울 겸 마신 막걸리에 취해 허청허청 걸으며 사람 좋은 웃음을 웃었으리라. 떠돌이 월부 장수의 애환과 객수가 아릿하다.황인숙 (시인)
-
전화

 


  마종기(1939~ )

 

 



당신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당신 방의 책장을

지금 잘게 흔들고 있을 전화 종소리,

수화기를 오래 귀에 대고

많은 전화 소리가 당신 방을

완전히 채울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래서 당신이 외출에서 돌아와 문을 열 때,

내가 이 구석에서 보낸 모든 전화 소리가

당신에게 쏟아져서

그 입술 근처나 가슴 근처를 비벼대고

은근한 소리의 눈으로

당신을 밤새 지켜볼 수 있도록.

 


다시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시집『변경의 꽃』(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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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접선되지 않은 전화벨 소리로 전해지는 사랑이라니. 아날로그 시대로 한참 거슬러 가서 생각해도 놀랍다. 보고 싶다 말하기도 어려운 사람, 그 사람에게, 받지 않는 전화란 걸 알면서도 전화를 걸어 ‘당신 방의 책장을 지금 잘게 흔들고 있을 전화 종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피는 뜨거워지고 혈류는 빨라지며 허파꽈리는 긴박하게 오물거리면서 사랑이 작동된다.




  누구나 이런 경험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게도 당신의 보이지 않는 뒷모습을 보며 비슷한 전화질을 해본 일이 있다. 지금은 짝사랑의 여인이었는지 헤어진 뒤의 그리움 때문인지조차도 분간이 어려운 오랜 기억이다. 어쨌든 당시 이장희의 ‘그건 너’의 노랫말처럼 그러다가 당신이 받으면 끊곤 하였는데 바보처럼 울지는 않았다.




  한번은 정말 이 시처럼 당신에게 옮겨가는 신호음만 즐겼던 것 같다. 전화벨이 거듭 울릴 때마다 커져가는 심장의 두근거림이 싫지 않았으며, 전화소리가 만들어가고 채워가는 풍경들 속에서 ‘은근한 소리의 눈’을 가질 수 있었던 게 위안이고 행복이었다.




  지금처럼 누구나 개인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않고 밤낮 없이 조물거리는 텔레토피아 세상에선 상상할 수도 없고 이해하기는 더욱 힘든 그림들이다. 잠시라도 휴대전화가 없으면 불안, 초조해하고 한참 동안 전화가 안 오면 등을 돌리거나 보낸 문자에 응답이 없으면 씹혔다 하여 배신감마저 드는 계산적이고 치밀한 시대이니 말이다.




  사랑의 모든 진행은 휴대전화로 피드백 되고 사랑을 전하던 전화로 연인과 작별하는 세상이고 보면, 아무런 표시도 없이 내가 보낸 소리의 공명만 가득한 당신의 방에서 혼자서 사랑을 전하며 마치 부치지 못하는 편지를 끊임없이 써대는 짓거리라니. 얼마나 청승맞고 멍청하고 미련한 사랑인가.




  그러나 서둘지 말고 한번쯤 생각해 보라. 이 진화되지 않은 철 지난 구닥다리 사랑법이 단호하고 즉각적인 이 시대의 사랑 놀음에 비해 그렇게나 덜 아름답고 더 어리석기만 한 것인가를.

 


  권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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