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야네 말(외 2편)
이시영
이렇게 비 내리는 밤이면 호롱불 켜진 호야네 말집이 생각난다. 다가가 반지르르한 등을 쓰다듬으면 그 선량한 눈을 내리깔고 이따금씩 고개를 주억거리던 검은 말과 "얘들아 우리 호야네 말 좀 그만 만져라!" 하며 흙벽으로 난 방문을 열고 막써래기 담뱃대를 댓돌 위에 탁탁 털던 턱수염이 좋던 호야네 아버지도 생각난다. 날이 밝으면 호야네 말은 그 아버지와 함께 장작짐을 가득 싣고 시내로 가야 한다. 아스팔트 위에 바지런한 발굽 소리를 따각따각 찍으며.
‘나라’ 없는 나라
어디 남태평양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섬은 없을까. 국경도 없고 경계도 없고 그리하여 군대나 경찰은 더욱 없는. 낮에는 바다에 뛰어들어 솟구치는 물고기를 잡고 야자수 아래 통통한 아랫배를 드러내고 낮잠을 자며 이웃 섬에서 닭이 울어도 개의치 않고 제국의 상선들이 다가와도 꿈쩍하지 않을 거야. 그 대신 밤이면 주먹만 한 별들이 떠서 참치들이 흰 배를 뒤집으며 뛰는 고독한 수평선을 오래 비춰줄 거야. 아, 그런 ‘나라’ 없는 나라가 있다면!
2호선
가난한 사람들이 머리에 가득 쌓인 눈발을 털며 오르는
지하철 2호선은 젖은 어깨들로 늘 붐비다
사당 낙성대 봉천 신림 신대방 대림 신도림 문래
다시 한바퀴 내선순환을 돌아
사당 낙성대 봉천 신림
가난한 사람들이 식식거리며 콧김을 뿜으며 내리는
지하철 2호선은 더운 발자국들로 늘 붐비다
—시집『호야네 말』(201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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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 / 1949년 전남 구례 출생.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수학.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월간문학》신인상 시 당선으로 등단. 시집 『만월』『바람 속으로』『길은 멀다 친구여』『이슬 맺힌 노래』『무늬』『사이』『조용한 푸른 하늘』『은빛 호각』『바다 호수』『아르갈의 향기』『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호야네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