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은뱅이고추밭으로 부는 바람
박완호(1965~ )
마땅한 찬거리가
없는 저녁 무렵이면 할머니
담장 옆 손바닥만 한
고추밭에 난쟁이처럼 쪼그리고
앉은뱅이고추를 한 바가지나 따시네
매운맛 되게
풍기는,
삼복의 논두렁을 겨우
건너온 할아버지
구부정한 발길이
지게작대기처럼 와 얹히는
초저녁 앉은뱅이고추밭
뙤약볕 아래 종일
시달리느라 축 처진,
막걸리 한 사발에
알딸딸한 할아버지
불그레한 낯빛마냥 얼얼한
바람 놀지면, 할머닌
알맞게 매운 풋고추를 따느라 정신없고
부엌의 가마솥뚜껑은
들썩들썩 입거품을 잔뜩 물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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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대형마트 앞
사거리를 지나는 데 아저씨 한 분이 '재래시장 죽이는 대형마트'라는 구호가 적힌 깃발을 들고 34도를 오르내리는 염천의 더위 속에 홀로 서
계시더군요. 시골에 살면서 얻게 되는 기쁨 중 하나가 재래시장 둘러보며 장보기이지요.
아직도 시골에는 오일장이 서는 데, 그런
장날에는 텃밭에서 나지 않는 고기들과 생선들과 과일들이 넘치고, 각종 방물들이 동화처럼 펼쳐져 있어요. 아주머니나 할머님들께서 직접 농사지은
것들로 돈을 사려고 장터 한쪽에 나와 계시기도 하지요. 이웃의 소식도 주고받고, 덤도 주고, 값도 흥정하는 인정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늦여름 "뙤약볕 아래
종일 시달리느라 축 처진,/막걸리 한 사발에 알딸딸한 할아버지/불그레한 낯빛마냥 얼얼한 바람 놀지면"장날 읍내에서 장 보아온 간고등어도 떨어져
"마땅한 찬거리가 없는 저녁 무렵" 할머니의 즉석 시장은 텃밭이 되지요.
깻잎은 따서 양념장을 얹어 밥솥에 찌고,
보랏빛 윤기 나는 가지도 두어 개 따서 데쳐 참기름에 무치고, "매운 맛 되게 풍기는"고추를 넣고 호박 숭덩숭덩 썰어 넣은 된장찌개가 뽀글뽀글
끓고, "부엌의 가마솥 뚜겅은 들썩들썩 입거품을 잔뜩 물었는데" "삼복의 논두렁을 겨우 건너온 할아버지/구부정한 발길이 지게작대기처럼 와
얹히는/초저녁"하늘에 개밥바라기별이 반짝 등불을 켜는 시골의 풍경도, 웬만한 면소재지 마다 들어선 대형마트에 밀려 사라져가고 있는 건
아닌지요.
서대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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