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가 된 소녀를 위하여
김기택
마흔이 넘은 그녀는
아직도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
오빠, 옛날하고 똑같다!
오빠, 신문에서 봤어.
오빠 시집도 읽었어, 두 권이나!
얼굴은 낯설었으나 웃음은 낯익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중년의 얼굴에서
옛날에 보았던 소녀가 뛰어나왔다.
작고 어리던 네가
다리 사이에 털도 나고 브래지어도 차는
크고 슬픈 몸이 되었구나.
네 가녀린 몸을 찢고
엄마보다 큰 고등학생 딸과
중학생 아들이 나왔구나.
긴 세월은 남편이 되고 아이들이 되어
네 몸에 단단히 들러붙어
마음껏 진을 빼고 할퀴고 헝클어뜨려 놓았구나.
삼십 여 년 전의 얼굴을 채 익히기도 전에
엄마와 아내를 찾는 식구들이 쳐들어오자
소녀는 얼른 웃음을 거두고
중년의 얼굴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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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상과 표현이 재미있는 시. 김기택의 시는 대상의 관찰과 묘사 그 정교함 위에 쌓아 올린 언어의 철옹성. 시가 재미있을 필요까지 있겠냐만, 감동에 이어 재미까지 우리에게 다가온다면 그건 금상첨화. 아하, 마흔이 넘은 그녀 속에 있는 십대, 이십대, 삼십대 모습. 나비처럼 팔랑거리다, 콩새처럼 통통 튀어 오르다, 새침이 돌아서기도 하는. 시인은 그녀가 웃을 때 중년의 얼굴에 옛날 보았던 소녀가 뛰어나온다 했다. 시인은 그녀를 처음 보았던 삼십 여 년 전 그 얼굴 채 익히기도 전, 엄마와 아내를 찾는 식구들이 쳐들어오고 소녀는 얼른 웃음 거두며 중년의 얼굴로 돌아간다.
나무 속엔 나무만 들어 있는 게 아니네. 구름의 발길이 남긴 흔적, 바람의 옷깃 스치고 간 이슬도 잠겨 있네. 또 어둠 속 엎디어 울던 바위 그늘도 스며 있네. 여치와 매미 울음소리 보듬고 간 시간도 층층 쌓여 있네. 그녀가 잠시 소녀로 돌아가 빛나던 순간 사라지고 다시 아줌마로 돌아섰을 때. 그녀는 다시 거침없이 수다를 떨며 다 큰 아이들에게 잔소리 퍼붓고 그렇게 다시 흔한 아줌마로 변한다. 그러나 잊지 말자. 여자는 아줌마를 거쳐야 비로소 위대한 엄마가 된다는 걸. 그들이 대한민국을 이끌어간다는 것을.
김완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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