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부질없는 시
정현종
시로써 무엇을 사랑할 수 있고
시로써 무엇을 슬퍼할 수 있으랴
무엇을 얻을 수 있고 시로써
무엇을 버릴 수 있으며
혹은 세울 수 있고
허물어뜨릴 수 있으랴
죽음으로 죽음을 사랑할 수 없고
삶으로 삶을 사랑 할 수 없고
슬픔으로 슬픔을 슬퍼 못 하고
시로 시를 사랑 못 한다면
시로써 무엇을 사랑할 수 있으랴
보아라 깊은 밤에 내린 눈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아무 발자국도 없다
아 저 혼자 고요하고 맑고
저 혼자 아름답다.
—시집『고통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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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 번째 배달하는 시는 「시, 부질없는 시」이다.
실용과 쓸모와 계산에만 매인 삶이여, 그 짐승 이빨 속에 끼인 시를 놓아다오.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와 매사에 파이팅! 파이팅을 외치는 구호와 긍정의 과잉은 자칫 얼마나 고단하고 속된 삶인가. 사방엔 비명과 발악, 그리고 날카로운 발자국들 가득하다. 그 발자국 위에 저 혼자 내리는 눈처럼 저 혼자 내렸다가 저 혼자 녹아버리는 시를 배달한다.
희망과 위로와 행복을 외쳐대는 새해의 클리셰(cliche)를 던져버리고 덧없고, 부질없고, 무용(無用)한 것들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위해 축배!
문정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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