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너머 시

먼 생 / 김경주

songpo 2016. 1. 25. 17:09

먼 생

—시간은 존재가 신(神)과 갖는 관계인가*


김경주



골목 끝 노란색 헌옷 수거함에
오래 입던 옷이며 이불들을
구겨 넣고 돌아온다
곱게 접거나 개어 놓고 오지 못한 것이
걸린지라 돌아보니
언젠가 간장을 쏟았던 팔 한 쪽이
녹은 창문처럼 밖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어둠이 이 골목의 내외(內外)에도 쌓이면
어떤 그림자는 저 속을 뒤지며
타인의 온기를 이해하려 들 텐데
내가 타인의 눈에서 잠시 빌렸던 내부나
주머니처럼 자꾸 뒤집어보곤 하였던
시간 따위도 모두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
감추고 돌아와야 할 옷 몇 벌, 이불 몇 벌,
이 생을 지나는 동안
잠시 내 몸의 열을 입히는 것이다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종일 벽으로 돌아누워 있을 때에도

창문이 나를 한 장의 열로 깊게 덮고

살이 닿았던 자리마다 실밥들이 뜨고 부풀었다

내가 내려놓고 간 미색의 옷가지들,

내가 모르는 공간이 나에게

빌려주었던 시간으로 들어와

다른 생을 윤리하고 있다

저녁의 타자들이 먼 생으로 붐비기 시작한다



————

*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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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입었던 옷에는 나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옷에서 종종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내 몸'을 발견할 때가 있다. 옷은 나만의 몸짓과 습관을 그대로 간직한 채 낡아간다. 나의 한 시절을 그대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옷을 재활용 수거함에 넣으며 시인이 포착해낸 것은 '생의 유한함'이다. 우리는 그저 생을 지나가면서 몇 벌의 옷과 몇 채의 이불에 흔적을 남기는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옷과 이불은 오직 나만을 기억해주지 않는다. 누군가 내 옷을 가져다 입는 순간, 옷은 다시 그 몸을 기억하게 될 테니까. 생은 그렇게 냉정하다. 나의 생이든 아니면 멀리 있는 생이든. 생은 그렇게 차갑게 흘러간다. 재능과 수준이 모두 빛나는 시다.

허연 (시인, 매일경제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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