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너머 시

연기의 알리바이 /김혜순

songpo 2016. 10. 6. 10:33

연기의 알리바이

 


자 연기를 내놓으시지
음험한 구름기둥을
엇갈린 약속의 그림자를
냄새나는 굴뚝의 알리바이를
감춰둔 손길의 행방을
모두 대 보시지
창문을 열어놓고
환풍기를 돌려 봤자 아무 소용 없어
동분서주해 봤자라니까
저기 날리는 검댕이 좀 봐
깔고 앉아도 난 다 알아
두 무릎 사이로 푸른 연기가
풍선처럼 튀어 나오잖아
게다가 손바닥까지 시커멓잖아
어서 고백해 보시지
아가리를 찢어 놓기 전에
아가리 속에서 냄새의 긴 끈을 꺼내
조사해 보기 전에
대는 게 신상에 좋을 거야
모두 불었어 정말이야 너만
남았어
그래도 나는 연기를 피워 본다
실내 가득히 냄새를 피워 본다
음험한 구름기둥 불기둥을
사라지며 부서지는 지난날의
날개 그림자를 가슴에 품어 보려
연기를 피워 본다 헛되이
손짓하며 몰래몰래 온 집을
허우적거리며 뛰어올라 본다
한 움큼의 연기를
끌어안으려 애써 본다


-김혜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지성사, 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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