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너머 시

이영광의 「슬픔이 하는 일」해설 / 이원

songpo 2016. 10. 18. 11:19

이영광의 「슬픔이 하는 일」해설 / 이원

슬픔이 하는 일

이영광

슬픔은 도적처럼 다녀간다

잡을 수가 없다

몸이 끓인 불,

울음이 꽉 눌러 터뜨리려 하면

어디론가 빠져 달아나버린다

뒤늦은 몸이 한참을 젖다 시든다

슬픔은 눈에 비친 것보다는 늘

더 가까이 있지만,

깨질 듯 오래 웃고 난 다음이나

까맣게 저를 잊은 어느 황혼,

방심한 고요의 끝물에도

눈가에 슬쩍 눈물을 묻혀두고는

어느 결에 사라지고 없다

슬픔이 와서 하는 일이란 겨우

울음에서 소리를 훔쳐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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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음은 몸이 끓인 불이에요. 울음이 내는 소리를 울음이 담긴 몸이 들어요. 몸은 점점 더 뜨거워지고 몸이 끓인 불을 식히느라 울음은 또 계속 나오지요.

슬픔은 무엇인가요? 안쪽으로부터의 통증. 먼 곳에서부터 스며든 습기. 젖고 난 뒤 시들 때까지 습기를 놓치지 않는 것.

날뛰는 분노를 이기는 힘.

울음이 슬픔의 목을 꽉 눌러 터뜨렸다면 울음은 사라졌을 거예요. 울음이 덮치기 직전 슬픔은 빠져나가요. 슬픔은 도적이에요. 모르게 오고 모르게 가요. 아니 간 줄 알았는데 계속 있어요. 깨질 듯 오래 웃고 난 다음에. 자신을 까맣게 잊은 줄도 모르고 있던 황혼에.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곳에. 슬픔은 눈에 비친 것보다 늘 가까이 있어요.

슬픔이 겨우 하는 일은 울음에서 소리를 훔쳐내는 일. 세상에서 제일 슬픈 형상, 소리도 낼 수 없는 울음이 있을 때, 그 소리는 슬픔이 가지고 있지요. 몸이 끓는 소리를 슬픔이 훔쳐 울음은 계속 되지요.

내 눈에 비친 것은 내가 들여다보는 거울이에요. 그러니 내 다른 얼굴인 줄 모르고 그렇게 모질게 하지 말아요. 서로 서로는 울음과 슬픔처럼, 눈에 비친 것보다 더 가까이 있어요.

이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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