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너머 시

레시피 동지 /김혜순

songpo 2018. 11. 25. 12:34



레시피 동지 (외 1편) 

   김혜순

 

 

 

눈이 와

흰 벌판 한가운데

물로 만든 척추처럼

개울이 흘렀다

 

나는 팥죽을 쑤었다

오른쪽 폐에서 피떡처럼

검붉은 기침이 펄떡거리고

 

집을 떠나 이곳에 오면서

이름도 적지 않고

초대장을 보냈는데

꼭 올 것만 같았다

 

공중에서 내려온

흰 시트를 헤치자

아빠, 네가 서 있었다

 

팥이 다 익었을 때

두 눈에 맺힌 아빠를 닦으며

흰 설탕을 넣었다

 

눈이 더 와

물로 만든 척추를 가진 새가

거대한 날개를 털며

일어나는 게 보였다

작은 물고기들이

폭설처럼 쏟아졌다

 

쏟아지고 나니 다 은빛 티스푼인

물고기들이었다

 

1. 오지 않은 날들이여

2. 오지 말고 돌아가라

풍경에서 소리란 소리가 다 말랐다

 

나는 포스트잇에

아빠 잘 가 라고 써야할지

아빠 가지 마 라고 써야할지

동지의 레시피를 적었다

 

하얀 동그라미를 빚어

뜨거운 팥죽 속에 000 자꾸 밀어 넣었다

나의 일부를 밀어 넣는 느낌

죽은 사람과 뭘 하며 밤을 보내지? 생각했다

 

살을 만지고 싶은데

흰 뼈의 풍경이었다

 

왠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날들에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한 국자 한 국자

눈밭에 팥죽을 던졌다

 



좀비 레인




좀비 내리는 날

다른 세상이 오는 날

내 마음이 죽었으므로

앞서 죽은 사람들의 이름과

고양이 울음과

톱 바이올린의 울음소리를

마음 대신 간직하기로 한다


(파란 하늘과 환한 꽃나무 아래

깍지낀 두 손 같은

끈적거리는 뇌를 가진 적도 있었지만)


좀비 자욱히 내리는 날

좀비는 다리를 질질 끌고 다닌다

그리하여 나는 다리를 질질 끌고 나간다 


그러나 나는 밤의 칠판에 추적추적 편지를 쓰는 선생

(선생은 머물고 학생은 떠난다)

나는 아마 달력 위에 영원히 빗금을 그으며 내릴 것만 같아


젖은 행주 같은 머리칼로 칠판을 지운다 무서워서 또 쓴다


어둠 속에 가만히 숨어 있겠다고 약속해줄게

어둠 속에 이빨을 드러내지 않겠다고 약속해줄게


그렇지만 죽음을 전파하러 무덤에서 일어납니다

살지도 죽지도 못하지만 제발 안아주세요


추적추적 처마 아래 좀비 내려서


나는 물속에서 뭉개지는 흐린 안경을 쓰고

대학본부의 중앙계단 아래서 피 흐르는 것들의 소리를 듣는다


좀비는 눈알이 빨개져도 괜찮아 그리하여 눈알이 빨개진다

좀비는 깡통을 걷어차도 괜찮아 그리하여 깡통을 걷어찬다


그리하여 밥을 안 먹어도 괜찮아 잠을 자지 않아도 괜찮아

젖어도 괜찮아 구겨져도 괜찮아 하염없이 축축한 편지를 쓴다


좀비 자욱히 내리고 또 내려 무덤에 손톱만한 창들이 꽂히는 날


살아 있는 척하는 거 쉬워, 그리하여 괜찮아

내 그림자를 뜯어먹고 배불러도 괜찮아


사방에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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