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너머 시

부리가 샛노란 말똥가리 두어 마리 데리고(외 2편)/김륭

songpo 2020. 12. 18. 17:11

부리가 샛노란 말똥가리 두어 마리 데리고(2)


김 륭

 


내일의 날씨가 우산을 들고 뛰어올 때까지
빗소리를 심었다 화분 가득


끓는다. 아직 태어나지 못한 말이 있어서, 누구십니까? 나는, 내가 만들지 않은 사람 나는, 끝이 난 다음에 시작되는 이야기 나는, 시작되지도 않고 끝이 나는 이야기 나는, 빗방울처럼 움켜쥔 배꼽으로 세상을 내려쳐보는 이야기여서, 그렇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마음은 찢어지는 게 찢어지지 않는 것보다 낫다*


천변 어딘가에 그림자를 숨긴 새들은 인간의 노래에서 도망 나온 글자들을 쪼아댔다


벌레보다 못한 말, 서서 잘 수 없는 말로 꿴 책이라니


엄마, 엄마는 왜 벌써부터
누워있는 거야


부리가 샛노란 말똥가리 두어 마리 데리고
죽은 듯 가만히 누워서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떠내려오거나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떠내려가다 보면


내가 가진 내 얼굴을 울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니


그래서 갑니다 이젠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당신에게
이번엔 엄마라고 불렀으니까 다음번엔 자기라고 불러도 될까, 하고
벚꽃고양이처럼 한쪽 귀 접어서


마지막 햇볕을 쬐는 듯 오늘의 기분이 우산을 들고
내일로 뛰어가 두 번 다시 오지 말라고, 나는
나 없어도 울지 마, 라는 책에 몸을
비끄러매는 것이다

 

* 메리 올리버.

 

 

개는 모름

 

 

어떤 날은 베개가
침대를 내려와 개처럼
짖는다

아직 꾸지도 않은 꿈이 담을 넘는다는 듯

그러나 개는 달처럼 반으로 접을 수 없고

개 옆에는 개, 달 옆에는 달

개의 발을 가만히 묶어놓는 빗소리가
베개 대신 침대 위로 기어올라
자라기 시작한다

낮보다 밤이 먼저니까 우린 언제나, 좋다
누우, 라고 노란 목소리 같은 걸 꺼내

세상을 괜히 겁주지 않아도 되는

사이


여자도 아니면서 아스피린 같은

아기 꿈을 꿨다 아직 오지도 않은 죽음이

속으로 하는 말을 들었다는 듯
뼈다귀를 핥아주는,

어떤 가난은 개를 참 많이 키운다

너무 많이 키워서 고요하다

내가 모르는 아주 먼 곳에서 자꾸

아는 이야기가 찾아온다는 듯

개에게 물리지 않기 위해
목이 긴 장화를 신고, 가만히
여긴 어디쯤일까?

밤을 홀딱 벗겨놓은
침대가 타자기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뱀이나 좀 고쳐줄래?

 

 

정말 모르겠어 나는, 너를

 

그러는 편이 좋지

나의 마지막은 너, 너의 마지막은

나이니까

 

하나도 안 중요해

 

헤어지든 말든 나는 계속 슬퍼할 거야

오랜만이지? 슬퍼하는 내 앞에서

슬퍼하는 척

 

나는 널 보고 있는 게 아니야

만지고 있어 네 몸속 깊숙이 나를

쑤셔 박는 중이야

 

나는 뱀, 이게 전부

너는 자루

 

아직 한참 멀었어 그러니까

부탁해줄래 눈을 감고

뱀이 안 되는 게 너무 많아서

, 뱀이 되었군

 

재미있겠군

 

이건 네가 한 말이 아니고

내가 한 말

 

나는 내 안에서

할 말이 너무 없어

고작 똥 싸고 오줌 누는

그 정도?

 

그래서 네 안에 깊숙이

풀어놓으려는 거야

 

말도 안 돼

 

이건 내가 한 말도

네가 한 말도 아니고

 

우리는 다정하게 그 말을 접어서

껍질을 벗기지 자유롭게

 

그리고 떠난다, 말도 안 돼

떠나는 소리가 들린다

 

연애는 참 독해

 

돌아온다, 떠났다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여긴, 코브라농장이군

 

그러게 말이야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집을 나갔다 막 돌아온

목소리가 내 모가지를 움켜쥐며

말했다

 

뱀이나 좀 고쳐줄래?

 

 

5회 동주문학상 수상 시집 애인에게 줬다가 뺏은 시 20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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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륭 / 1961년 진주 출생. 2007문화일보신춘문예 시, 강원일보신춘문예 동시 당선. 시집 살구나무에 살구비누 열리고』『원숭이의 원숭이』『애인에게 줬다가 뺏은 시외 청소년 시집과 동시집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