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리가 샛노란 말똥가리 두어 마리 데리고(외 2편)
김 륭
내일의 날씨가 우산을 들고 뛰어올 때까지
빗소리를 심었다 화분 가득
끓는다. 아직 태어나지 못한 말이 있어서, 누구십니까? 나는, 내가 만들지 않은 사람 나는, 끝이 난 다음에 시작되는 이야기 나는, 시작되지도 않고 끝이 나는 이야기 나는, 빗방울처럼 움켜쥔 배꼽으로 세상을 내려쳐보는 이야기여서, 그렇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마음은 찢어지는 게 찢어지지 않는 것보다 낫다*
천변 어딘가에 그림자를 숨긴 새들은 인간의 노래에서 도망 나온 글자들을 쪼아댔다
벌레보다 못한 말, 서서 잘 수 없는 말로 꿴 책이라니
엄마, 엄마는 왜 벌써부터
누워있는 거야
부리가 샛노란 말똥가리 두어 마리 데리고
죽은 듯 가만히 누워서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떠내려오거나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떠내려가다 보면
내가 가진 내 얼굴을 울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니
그래서 갑니다 이젠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당신에게
이번엔 엄마라고 불렀으니까 다음번엔 자기라고 불러도 될까, 하고
벚꽃고양이처럼 한쪽 귀 접어서
마지막 햇볕을 쬐는 듯 오늘의 기분이 우산을 들고
내일로 뛰어가 두 번 다시 오지 말라고, 나는
나 없어도 울지 마, 라는 책에 몸을
비끄러매는 것이다
* 메리 올리버.
개는 모름
어떤 날은 베개가
침대를 내려와 개처럼
짖는다
아직 꾸지도 않은 꿈이 담을 넘는다는 듯
그러나 개는 달처럼 반으로 접을 수 없고
개 옆에는 개, 달 옆에는 달
개의 발을 가만히 묶어놓는 빗소리가
베개 대신 침대 위로 기어올라
자라기 시작한다
낮보다 밤이 먼저니까 우린 언제나, 좋다
누우, 라고 노란 목소리 같은 걸 꺼내
세상을 괜히 겁주지 않아도 되는
사이
여자도 아니면서 아스피린 같은
아기 꿈을 꿨다 아직 오지도 않은 죽음이
속으로 하는 말을 들었다는 듯
뼈다귀를 핥아주는,
어떤 가난은 개를 참 많이 키운다
너무 많이 키워서 고요하다
내가 모르는 아주 먼 곳에서 자꾸
아는 이야기가 찾아온다는 듯
개에게 물리지 않기 위해
목이 긴 장화를 신고, 가만히
여긴 어디쯤일까?
밤을 홀딱 벗겨놓은
침대가 타자기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뱀이나 좀 고쳐줄래?
정말 모르겠어 나는, 너를
그러는 편이 좋지
나의 마지막은 너, 너의 마지막은
나이니까
하나도 안 중요해
헤어지든 말든 나는 계속 슬퍼할 거야
오랜만이지? 슬퍼하는 내 앞에서
슬퍼하는 척
나는 널 보고 있는 게 아니야
만지고 있어 네 몸속 깊숙이 나를
쑤셔 박는 중이야
나는 뱀, 이게 전부
너는 자루
아직 한참 멀었어 그러니까
부탁해줄래 눈을 감고
뱀이 안 되는 게 너무 많아서
뱀, 뱀이 되었군
재미있겠군
이건 네가 한 말이 아니고
내가 한 말
나는 내 안에서
할 말이 너무 없어
고작 똥 싸고 오줌 누는
그 정도?
그래서 네 안에 깊숙이
풀어놓으려는 거야
말도 안 돼
이건 내가 한 말도
네가 한 말도 아니고
우리는 다정하게 그 말을 접어서
껍질을 벗기지 자유롭게
그리고 떠난다, 말도 안 돼
떠나는 소리가 들린다
연애는 참 독해
돌아온다, 떠났다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여긴, 코브라농장이군
그러게 말이야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집을 나갔다 막 돌아온
목소리가 내 모가지를 움켜쥐며
말했다
뱀이나 좀 고쳐줄래?
⸺제5회 동주문학상 수상 시집 『애인에게 줬다가 뺏은 시』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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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륭 / 1961년 진주 출생. 2007년 〈문화일보〉신춘문예 시, 〈강원일보〉신춘문예 동시 당선. 시집 『살구나무에 살구비누 열리고』『원숭이의 원숭이』『애인에게 줬다가 뺏은 시』 외 청소년 시집과 동시집 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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