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커
시계 반대 방향으로 어둠이 지나갔다
어둠의 보폭은 한 뼘, 두 뼘, 조금씩 환해지는 것
벽을 짚고 헤드폰을 쓰고
우리는 흙의 자세로 바닥에 누워
석류가 터지는 소리를 기록했다
비밀이 있던 자리에 빛을 침투시키면
백 개의 물이 금빛으로 흘러갔다
흑연을 껴안고 서 있는 시간의 기둥
지우개 밥보다 가볍게 흩어지는 죽은 약속의 입자들
사과꽃은 벽 속에서 말문이 트였다
옹알이에서 나온 첫말, 눈부셔
캄캄한 에코로 집을 지으며 빗소리도 들었지만
곤충도 절지동물도 자라지 않았다
천장은 낮고 전깃줄은 스물두 개
입구와 출구를 찾는 법은 햇빛 냄새를 따라가는 것
녹슨 자물쇠를 더듬으며 나비를 풀어 주고
어둠보다 더 어두운 그림자를 밟으며
우리는 새벽까지 수맥을 따라갔다
바닥은 빛을 다 드러냈다
⸻시집 『석류가 터지는 소리를 기록했다』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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