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너머 시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최승자

songpo 2014. 12. 10. 18:21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최승자(1952~ )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다고도 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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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고등학교에서 배운 시들은 추상적이고 모호한 단어들로 차있었다. 학창 시절 내 문학세계는 이런 교과서 시를 막연하게 동경하는 선에 머물러 있었다. 고교 2학년 어느 날, 친구 하나가 최승자 시인의 이 시를 내게 불쑥 내밀었다. 충격이었다. 내면의 고통이 살을 뚫고 터져 나온 듯 아프면서도 시원했다. 그 전까지 알던 시와 너무나 다른 낯섦의 자각이 통렬해서 한 자 한 자 씹어 먹었다. 내가 살아가면서 세상과 사람을 대할 때 견지해야 할 기본 태도가 결정되었다. 모호한 관념에서 벗어날 것, 현실로 튀어나와서 구체적일 것, 진실에 들어갈 때는 몸으로 느끼고 받아들일 것.
 7년 만에 내놓은 새 앨범 ‘겨울, 그리고 봄’에서 나는 노래했다. “너의 손에 아무 것 없으니/너의 작은 몸은 깃털처럼 가볍겠구나(…)/어느 길을 가든 너의 길/어느 곳에 있던 너의 집.”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새로 갖게 해준 최승자의 시를 나는 요즘도 웅얼웅얼 옹아리처럼 입에 달고 산다. _말로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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