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의 몸
길상호
감자를 깎다 보면 칼이 비켜가는
움푹한 웅덩이와 만난다
그곳이 감자가 세상을 만난 흔적이다
그 홈에 몸 맞췄을 돌멩이의 기억을
감자는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벼랑의 억센 뿌리들처럼 마음 단단히 먹으면
돌 하나 깨부수는 것 어렵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뜨거운 夏至의 태양에 잎 시들면서도
작은 돌 하나도 생명이라는
뿌리의 그 마음 마르지 않았다
세상 어떤 자리도 빌려서 살아가는 것일 뿐
자신의 소유는 없다는 것을 감자의 몸은
어두운 땅 속에서 깨달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웅덩이 속에
씨눈이 하나 옹글게 맺혀 있다
다시 세상에 탯줄 될 씨눈이
옛 기억을 간직한 배꼽처럼 불거져 있다
모르는 사람들은 독을 가득 품은 것들이라고
시퍼런 칼날을 들이댈 것이다
- 시집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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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던 어린 시절 여름에 수박을 먹다가 씨를 뱉어내며 그걸 땅에다 심으면 수박이 주렁주렁 달리지 않을까 상상을 하고선 정말로 마당에다 씨를 심은 적이 있었다. 씨를 마당에다 뱉어낼 때도 최대한 멀리 폭신한 흙 위에 안착되기를 기대하며 입술을 오무렸다. 그후 얼마간 눈만 뜨면 쪼르륵 마당으로 달려가서 변화를 관찰하였다. 결국 덮어놓고 씨를 심는다고 다 열매가 되진 않는다는 소중한 경험만 얻고 나의 파종과 경작은 실패로 끝났다.
감자는 통감자를 심기도 하지만 씨감자 값이 비싸서 보통은 잘라서 심는다. 움푹한 웅덩이의 씨눈 부위를 기준으로 이등분 혹은 4등분 정도 잘라 싹이 나오도록 한 다음 그걸 심는다. 우리는 감자를 깎다가 홈이 진 부분은 귀찮아하면서 도려내지만 ‘그곳이 감자가 세상을 만난 흔적’이고 생명의 뿌리이다. 누군가 내 몸에 갖다 대준 은혜로운 흔적의 자리인 것이다. 상처라면 높고 귀한 엄마의 사랑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