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너머 시

나사를 보면 /박몽구

songpo 2015. 7. 19. 11:54

나사를 보면

 

박몽구

 

 

 

남들은 나사를 굳게 조여야 한다는데

나는 나사를 보면 다 풀고 싶다

내 나이보다 더 늙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빌리 할리데이의 흐린 재즈를 듣다 보면

라디오 뒤쪽으로 가 나사를 풀고

낡은 덮개를 연 다음

꼭 조여든 멱살을 풀어주고 싶다

늙은 진공관에 달라붙은 먼지를 털어내

그녀의 쉬고 지친 목소리에

봄볕 한 줌 얹어주고 싶다

 

분장실 한 구석에서 가슴을 드러낸채 마약을 했다고

옐로우 페이퍼들은 지면을 도배하지만

갑갑한 라디오 캐비닛에서 꺼내

할리데이의 등에 지렁이가 기어간 듯

구불구불 패인 채찍 자국을 가려주고 싶다

 

주말 저녁 심수봉의 노래를 듣다 보면

후줄근한 가을비도 내리지 않는데

나도 모르게 횡격막이 팽팽하게 젖는다

그런 밤에는 티뷔의 나사를 풀고

궁정동 밀실에 묶여 있는 심수봉을 꺼내

가슴 깊이 잠복한 피멍을 풀어주고 싶다

 

다들 나사를 조이기에 바쁜 세상

스위스 비밀금고에 뭉칫돈을 넣은 채

보이지 않게 나사를 조이고

팽목항에서 사라진 일곱 시간이 담긴 파일을

꼭꼭 조인 나사는

대가리를 뭉개버려 풀 수도 없다

 

손석희의 뉴스 룸은 넓지만

할 말은 끝내 물 밑으로 잠겨 나오지 못하고

겉으로 화려한 쇼들로 시끄러운 저녁

나는 늙은 라디오의 나사를 푼다

먼지 성성한 스피커가 삼켜버린 말들을 찾아

비밀의 켜들을 연방 털어낸다

 

 

 

—《다층》2015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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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몽구 / 1956년 광주 출생. 한양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77년 《대화》로 등단. 시집 『개리 카를 들으며』『마음의 귀』『봉긋하게 부푼 빵』『수종사 무료 찻집』등. 연구서『모더니즘과 비판의 시학』『한국 현대시와 욕망의 시학』등. 계간 《시와 문화》주간. 한양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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