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김중일
해변에 떨어진 초록 샌들을 주워와 네게 주었다.
너는 내가 건넨 호박을 잘게 잘라 넣고 찌개를 끓였다.
곧 식탁 위에는 검은 물웅덩이 하나가 올라왔다.
웅덩이로 떨어진 빗방울들이 치어떼처럼 들끓었다.
나는 소매로 깨끗하게 웅덩이를 훔쳐 네게 주었다.
너는 내가 훔쳐다 준 챙이 큰 모자를 늘 쓰고 다녔다.
나는 너의 뺨에 자꾸 달라붙으려는 나비를 쫓았다.
안돼요 안돼.
너는 나비를 잡아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너의 귀에 달려 있던 귀한 걸이였다.
그것은 돌연한 한줌 바람에도 공중으로 솟구쳤다 떨어졌다.
떨어지며 나뭇잎은 마지막으로 허공에 제 찰나의 이름을 썼다.
너는 바닥에 떨어진 내 셔츠를 주웠다.
더러워진 흰 셔츠가 공중으로 휙 들리는 순간.
나는 셔츠 속에서 작은 케이크를, 마술처럼 잽싸게 꺼내 건넸다.
너는 짐짓 깜짝 놀란 얼굴로,
감쪽같이 새것처럼 빛나는 초록 샌들을 두 손에 받아들며
너무나 환하게 가엾도록 환하게 웃었다.
너는 내게 건네받은 그 새파란 거짓말을 밤새도록 반짝반짝 닦았다.
—시집『내가 살아갈 사람』(201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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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샌들, 검은 물웅덩이, 챙이 큰 모자, 나비…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시인의 개인적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에게 묻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기표를 무심코 따라가다 보면 미궁에 빠질지 모릅니다. 그런데 시를 읽어가다 보니 어느 가난한 연인의 집 창가에 우두커니 서 있게 되었네요. 아마 무슨 기념일쯤이라 보입니다. ‘네게 주었다’ 말하는 사람은 분명 바깥사람이겠지요. 그 안사람은 ‘올려놓’기를 부지런히 합니다. 창 너머로 보이는 바깥사람이 부럽습니다. 줄 때마다 돌아오는 안사람의 높임 때문입니다. 그리고 ‘평생’ 거짓말로라도 누군가를 기쁘게 하였는지 돌아봅니다.
이민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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