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너머 시

식물원에서 /조정권

songpo 2015. 9. 14. 17:10

식물원에서

조정권

손에 쥐가 나듯

방송 원고를 이십년간 써댄

마누라 팔을 데리고 가

식물학자한테 보여준다.

시 쓰다 말고 잠시 한눈판

이 손도 슬쩍 보여준다.

겨울나무들 영양제 꽂고 살고 있다.

죄송스런 이 손 식물원에 입원시킬까.

피로회복차 소주잔 들었던 이 손,

무거운 몸뚱이도 같이 들어올렸던

이 손, 마당에 내려놓고 싶다.

안구나 신장 따위 없는 겨울나무들

산소호흡기 매달고 사는 겨울나무들.

공중에 주렁주렁 매달려 살고 있다.

시 쓰던 팔 내려놓을 곳,

눈 둘 바를 모르고, 멀뚱히 뜨고 있는

안구 기증할 곳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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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청년이 길을 가다가 무언가 떨어뜨린다. 지나가던 노인이 그것을 주워 청년을 부르지만 청년은 듣지 못한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기 때문이다. 노인이 있는 힘을 다해 느릿느릿 뛰어가 등을 칠 때까지 청년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아무것도 듣지 않는 귀는 불안하다. 무엇으로든 즉시 채워지지 않는 침묵과 여백은 불안하다. 무언가 읽거나 보지 않는 눈은 불안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입은 불안하다. 아무것도 쓰지 않는 손은 불안하다. 스마트폰과 이어폰이 늘 붙어 있어야 하고 수다 떨 친구가 있어야 한다. 이목구비와 마음과 정신을 그토록 혹사하고도, 잠깐의 휴식은 벌 받는 것처럼 힘들고 불안하다.

아무 글도 쓰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잡거나 쥐지 않고, 나무는 온종일 전 생애를 공중에 팔을 든 채 서 있는데, 그렇게 팔을 들기만 하고도 많은 잎과 꽃과 열매를 맺는데, 이 눈, 이 머리, 이 팔, 이 마음은 왜 그렇지 못할까. 병이, 늙음이, 죽음이 강제로 내려놓아주기 전에, 먼저 자발적으로 내려놓을 수는 없을까.

김기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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