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너머 시

달은 아직 그 달이다 /이상국

songpo 2016. 5. 12. 07:44

달은 아직 그 달이다 (외 3편)

이상국

나 어렸을 적 보름이나 되어 시뻘건 달이 앞산 등성이 어디쯤에 둥실 떠올라 허공 중천에 걸리면 어머니는 야아 야 달이 째지게 걸렸구나 하시고는 했는데, 달이 너무 무거워 하늘의 어딘가가 찢어질 것 같다는 것인지 혹은 당신의 가슴이 미어터지도록 그립게 걸렸다는 말인지 나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어쨌든 나는 이 말을 시로 만들기 위하여 거의 사십여년이나 애를 썼는데 여기까지밖에 못 왔다. 달은 아직 그 달이다.

그늘

봄이 되어도 마당의 철쭉이 피지 않는다

집을 팔고 이사 가자는 말을 들은 모양이다

꽃의 그늘을 내가 흔든 것이다

몸이 있는 것들은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다

아내는 집이 좁으니 책을 버리자고 한다

그동안 집을 너무 믿었다

그들은 내가 갈 데가 없다는 걸 아는 것이다

옛 시인들은 아내를 버렸을 것이나

저 문자들의 경멸을 뒤집어쓰며

나는 나의 그늘을 버렸다

나도 한때는 꽃그늘에 앉아

서정시를 쓰기도 했으나

나의 시에는 먼 데가 없었다

이 집에 너무 오래 살았다

머잖아 집은 나를 모른다 할 것이고

철쭉은 꽃을 버리더라도 마당을 지킬 것이다

언젠가 모르는 집에 말을 매고 싶다

커피 기도

커피점에 온 모녀가

커피가 나오자 기도를 한다

나는 보던 책을 내려놓았다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기도는 길어지고

딸이 살그머니 눈을 떠 엄마를 살피고는

다시 눈을 감는다

하느님도 따뜻한 커피를 좋아하실 텐데……

그래도 날고 싶다

노랑부리저어새는 저 먼 오스트레일리아까지 날아가 여름을 나고 개똥지빠귀는 손바닥만 한 날개에 몸뚱이를 달고 시베리아를 떠나 겨울 주남저수지에 온다고 한다

나는 철 따라 옷만 갈아입고 태어난 곳에서 일생을 산다

벽돌로 된 집이 있고 어쩌다 다리가 부러져도 붙여주는 데가 있고 사는 게 힘들다고 나라가 주는 연금도 받는다

그래도 나는 날아가고 싶다

—시집『달은 아직 그 달이다』(20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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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 1946년 강원도 양양 출생. 1976년 《심상》에 「겨울 추상화」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 시집 『동해별곡』『우리는 읍으로 간다』『집은 아직 따뜻하다』『어느 농사꾼의 별에서』『뿔을 적시며』, 시선집 『국수가 먹고 싶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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