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너머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최금진

songpo 2016. 5. 1. 19:14

살아남은 자의 슬픔

최금진


장미를 라면 속에 넣고 끓여 먹은 적이 있다네
한 바구니 붉은 꽃잎들이 숨이 죽고 팔팔 끓을 때
너에 대한 혐오, 너에 대한 집착, 사랑의 양가성
설사를 하고, 설사에 향기가 없을 때
나는 문득 우리가 헤어지고 만 것을 알았다네
편의점에 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을 때, 다시 유월이었고
허기가 컵라면의 본질이란 사실을 후루룩 마시며
사랑이 정욕이었다는 기억마저 식었을 때
헐떡이는 개처럼, 물을 너무 많이 마신 돼지처럼
갑자기 사는 게 몽롱해졌다네
너무 많은 허무가 코끝으로 소용돌이치며 몰려들 때
나는 스무 살이었고, 너도 스무 살이었던 것
편의점 맞은편 담장 아래서
너의 음부에 꽂아두고 오래 보고 싶었던 그 장미들이
빗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네
다 가버렸네, 믿었던 것, 믿고 싶었던 것, 믿어야 할 것
아주 약간의 희망은 하나도 없는 것과 같으니
온몸으로 장맛비를 붕대처럼 감고
자신의 붉은 색에는 끝내 도달하지 못한 채
장미는 지고 있었네 빗줄기 속에서
너를, 너였던 것을, 너 아닌 것을 후루룩 마시고 있네
사람들은 우산을 쓴 채 멈추었다 가고, 멈추었다 가고
누가 이 절망의 스승인지
사랑은 가고, 사랑이라 여겼던 무지와 치욕마저 가고
나는 살아 있네, 살아서 이렇게 라면을 먹고 있네



-『 현대시학』(2011년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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