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너머 시

바람이 모이는 곳에 앉아 있었다 /이제니

songpo 2016. 12. 29. 22:15

바람이 모이는 곳에 앉아 있었다


이 제 니




바람이 모이는 곳에 앉아 있었다. 짧게 끊어 썼다. 볕이 좋은 날이었다. 내일의 날씨는 맑음 흐림 구름 비.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꽃잎이 떨어져 있었다. 그림자 사라지고. 두 번 뒤집어 접고. 꽃잎이 떨어진 자리에는 고양이 하나가 있고. 얼핏 보기에도 상처는 깊고. 두 눈은 멀리 보고 있고. 눈동자 뒤로 기나긴 길이 펼쳐져 있고. 죽은 너와 함께 걷고 있었다. 길은 끝이 없었다. 나무도 끝이 없었다. 나무 사이 사이 흰꽃이 수북했다. 나무의 이름은 묻지 않았다. 아직까지 흔들리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직까지 잃어버릴 것들이 있습니다. 고양이는 고양이의 길을 가고. 너는 너의 길을 가고. 나는 빈손으로 앉아 눈길을 주고 눈길을 주고. 어둠은 어둠이 아닌 것들을 덧입고 있었다. 여름은 새벽의 텅 빈 운동장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늘은 그늘을 드리우고. 얼굴은 얼굴로 다시 들여다보고. 아직까지 모르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직까지 묻지 못한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너와 나와 고양이는 밑변이 없는 삼각형 속에 앉아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멀어지면서 먼 눈길이 되고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멀어지면서 멀리 한 점이 되고 있었다. 흰꽃은 휘날리고 휘날리고. 향기는 스며들고 스며들고. 오래된 나무는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너는 말했다. 나는 나무 곁에 놓여 있는 돌멩이 하나를 보고 있었다. 돌멩이 곁으로 어제의 고양이가 지나가고 있었다. 바람이 모이는 곳에 앉아 있었다. 뒤로 넘겨서 썼다. 꿈결이 그리 멀지 않았다.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2010년 시집『아마도 아프리카』『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