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줄 알았지 (외 1편)
이소연
내 화분들처럼
나는 생각이 없어서
빗속엔 비가
번데기엔 날개가
없는 줄 알았지
내 집엔 나 말곤 아무도 없는 줄 알았지
나는 발가벗고 밀대를 밀며 춤을 추었지
그러나 누군가 나를 훔쳐보고 있었어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믿을 때
여전히 비는 비의 어깨에 젖고
번데기 안에서는 하늘이 꼬깃꼬깃 접히는 거지
너는 내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줄 알 거야
쭉정이고 생선 가시이고
빈 접시이고, 거품이고, 굴뚝인
내 화분들처럼
그러나 나는 생각이 없어서
개념이 없어서
생활 계획표를 결혼사진 밑에 걸어두었지
너는 내게 초침으로 깎아놓은 연필 몇 자루와
서랍이 없어 생각이 넓은 책상과
카페에서 바꿔 들고 온 파란 가방이 있다는 것도
그러나 소지품들은 모조리 그대로라는 것도 알지 못하지
싸리나무 잎과 줄기를 달여 먹고 있어, 나는
방충망에 고인 청개구리의 울음소릴 모아두었어
그리고 무엇보다
빈 파이프가 있었지
너는 모르고 있을 테지만
내겐 이보다 근사한 것들이 몇 개는 더 있어
이를테면 사막여우가 주고 간 라이터 같은 것
하지만, 들키기 전까지 콧노래를 부르며 나는 춤을 출 거야
밀대처럼
—《시인수첩》2016년 겨울호
눈먼 치정
피 터지도록 싸우고
발바닥공원을 지나는데
사이사이 놓여 있는 빈 벤치들
숲속도서관은 문이 닫혔고
야외무대의 음악회마저 무기한 연기된
발바닥과 발바닥이 번갈아 기록하는
별 볼 일 없는 산책
한번 속고 또 속고
권태에 빠진 일상은 도도하지만
나는 기어코 동사무소엘 간다
혼인신고 출생신고 전입신고도 했으니 남편도 신고해 볼까 하고
말 하나가 가슴에 창을 내고, 그 창에 화염이 어릴 때,
불구덩이 속에서 새도 죽고 구더기도 죽는 순간
나도 죽었는데
욕지거리하며 문 밖으로 나간 그림자만 살아있다
나는 그림자마저 산 채로 묻어버릴 거다
늘상 중얼거리는, 나무 뒤편에서 낄낄거리는 꽃잎들이
불쾌하다
팔 다리 뒤엉켜버리는 이 터무니없는 간격을 왜 그리도 사랑했을까
이혼서류에 들어앉은 참새 소리는 너무나 밝고
작은 연못의 물결 세우고 건너는 물뱀의
무늬들이 화난 얼굴의 나를 사분대다 놓쳐버릴 때
나는 조금 전 알았던 것을 까먹는다
그러면 마음은, 언제 좋은 생활이 올 것인가 또 생각하겠지
—《시인동네》2016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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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연/ 1983년 포항 출생. 2014년 〈한국경제〉청년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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