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너머 시

없는 줄 알았지 / 이소연

songpo 2016. 12. 27. 19:23

없는 줄 알았지 (외 1편)

 

이소연

 

 

 

내 화분들처럼

 

나는 생각이 없어서

빗속엔 비가

번데기엔 날개가

 

없는 줄 알았지

 

내 집엔 나 말곤 아무도 없는 줄 알았지

나는 발가벗고 밀대를 밀며 춤을 추었지

그러나 누군가 나를 훔쳐보고 있었어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믿을 때

여전히 비는 비의 어깨에 젖고

번데기 안에서는 하늘이 꼬깃꼬깃 접히는 거지

 

너는 내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줄 알 거야

쭉정이고 생선 가시이고

빈 접시이고, 거품이고, 굴뚝인

 

내 화분들처럼

 

그러나 나는 생각이 없어서

개념이 없어서

생활 계획표를 결혼사진 밑에 걸어두었지

 

너는 내게 초침으로 깎아놓은 연필 몇 자루와

서랍이 없어 생각이 넓은 책상과

카페에서 바꿔 들고 온 파란 가방이 있다는 것도

그러나 소지품들은 모조리 그대로라는 것도 알지 못하지

 

싸리나무 잎과 줄기를 달여 먹고 있어, 나는

방충망에 고인 청개구리의 울음소릴 모아두었어

그리고 무엇보다

빈 파이프가 있었지

 

너는 모르고 있을 테지만

내겐 이보다 근사한 것들이 몇 개는 더 있어

이를테면 사막여우가 주고 간 라이터 같은 것

 

하지만, 들키기 전까지 콧노래를 부르며 나는 춤을 출 거야

밀대처럼

 

 

 

—《시인수첩》2016년 겨울호

눈먼 치정

 

 

피 터지도록 싸우고

발바닥공원을 지나는데

사이사이 놓여 있는 빈 벤치들

숲속도서관은 문이 닫혔고

야외무대의 음악회마저 무기한 연기된

발바닥과 발바닥이 번갈아 기록하는

별 볼 일 없는 산책

 

한번 속고 또 속고

권태에 빠진 일상은 도도하지만

 

나는 기어코 동사무소엘 간다

혼인신고 출생신고 전입신고도 했으니 남편도 신고해 볼까 하고

 

말 하나가 가슴에 창을 내고, 그 창에 화염이 어릴 때,

불구덩이 속에서 새도 죽고 구더기도 죽는 순간

나도 죽었는데

욕지거리하며 문 밖으로 나간 그림자만 살아있다

나는 그림자마저 산 채로 묻어버릴 거다

 

늘상 중얼거리는, 나무 뒤편에서 낄낄거리는 꽃잎들이

불쾌하다

팔 다리 뒤엉켜버리는 이 터무니없는 간격을 왜 그리도 사랑했을까

이혼서류에 들어앉은 참새 소리는 너무나 밝고

 

작은 연못의 물결 세우고 건너는 물뱀의

무늬들이 화난 얼굴의 나를 사분대다 놓쳐버릴 때

나는 조금 전 알았던 것을 까먹는다

그러면 마음은, 언제 좋은 생활이 올 것인가 또 생각하겠지

 

—《시인동네》2016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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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연/ 1983년 포항 출생. 2014년 〈한국경제〉청년 신춘문예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