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너머 시

떡갈나무 마녀와 꿈사냥꾼/김영찬

songpo 2019. 10. 10. 16:26



떡갈나무 마녀와 꿈사냥꾼

 

   김영찬

 

 

 

푸른 말을 탄 나의 외조부는 어린 나를 떡갈나무 마녀에게 맡겼다

말마라 아무 말 마시고 이 아이에게 마음껏

저주를 퍼부으시라!

말마라 아무 말 마시라 그러나 단지

열 살이 될 때까지만.

 

떡 한 시루 뇌물 받은 마녀는 그 후

손바닥 푸른 나를 맡은 뒤 한 번도 나의 외조부와 만난 적 없지만

말마라 말도 마시라 틈만 나면 떡갈나무 밑동 흔들어

어린 나를 몰아쳤다

 

마녀의 속셈은, 열 살이 넘어도 떡갈나무 무성한 그늘을 떠나지 못하게

나를 막는 것

떡갈나무 숨소리나 다듬어주고

떡갈나무 잎에 깃든 요정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라는 것

빤한 계략 훤히 알지만

유약한 나는 밤마다 내 꿈속의 아지트에 건장한

꿈사냥꾼들을 불러들였다

 

꿈을 어지럽힌다는 죄목으로 꿈사냥꾼을 닦달하는 마녀는

꿈의 출입구마다 덫을 친 훼방꾼

그러나 나는 해냈다 해내고야 말았다 그것은 내가 열 살이 되기 전

코를 골고 잠든 마녀를 피해

발바닥에 불을 붙이고 도망치는 잔꾀가 아니라

 

말마라 말도 마시라 그날따라 험상궂게 머리 풀어헤친 마녀 앞에

당랑거철(螳螂拒轍), 당당하게

팔짱 끼고 서서

나 이제 떡갈나무 숲을 떠나겠소, 여길 떠나

꿈사냥꾼들과 낯선 사냥터에 새로운 발자국을 찍겠소,

호언장담 대들었다

 

알았다 이눔아, 하지만 이렇게나 쉽게 너무 일찍 설치다니!

 

흑발의 마녀가 억센 발길질로 나를 뻥 차는 대신 어찌나 힘껏 끌어안았던지

꿈꾸고 있지 않던 내 꿈의 골조가

무너질 지경

마녀는 내게 새 신발 여덟 켤레를 선물로 주었다

말마라 말도 마시라 그것은 한 시절 무성했던 떡갈나무 너른 잎이 엮어낸

바람의 구두

구름의 낙하산

 

언제 어디로 떠돌아다녀도 굽이 닳거나 밑창 해지는 일이 없는

떡갈나무 문장이 뚜렷한

여름의 진면목

떡갈나무를 꿰뚫어 알게 된 나는 나뭇가지마다

바람의 통로를 터주러 오늘도 편하게

구두끈 매고 문간을 나선다

'시 너머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네트 /고영민  (0) 2019.10.16
초밥을 먹으며 / 정한용  (0) 2019.10.14
블라인드 /이은심  (0) 2019.10.05
나무와 양의 결혼식 /송찬호  (0) 2019.10.05
자화상 /윤동주  (0) 2019.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