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갈나무 마녀와 꿈사냥꾼
김영찬
푸른 말을 탄 나의 외조부는 어린 나를 떡갈나무 마녀에게 맡겼다
말마라 아무 말 마시고 이 아이에게 마음껏
저주를 퍼부으시라!
말마라 아무 말 마시라 그러나 단지
열 살이 될 때까지만.
떡 한 시루 뇌물 받은 마녀는 그 후
손바닥 푸른 나를 맡은 뒤 한 번도 나의 외조부와 만난 적 없지만
말마라 말도 마시라 틈만 나면 떡갈나무 밑동 흔들어
어린 나를 몰아쳤다
마녀의 속셈은, 열 살이 넘어도 떡갈나무 무성한 그늘을 떠나지 못하게
나를 막는 것
떡갈나무 숨소리나 다듬어주고
떡갈나무 잎에 깃든 요정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라는 것
빤한 계략 훤히 알지만
유약한 나는 밤마다 내 꿈속의 아지트에 건장한
꿈사냥꾼들을 불러들였다
꿈을 어지럽힌다는 죄목으로 꿈사냥꾼을 닦달하는 마녀는
꿈의 출입구마다 덫을 친 훼방꾼
그러나 나는 해냈다 해내고야 말았다 그것은 내가 열 살이 되기 전
코를 골고 잠든 마녀를 피해
발바닥에 불을 붙이고 도망치는 잔꾀가 아니라
말마라 말도 마시라 그날따라 험상궂게 머리 풀어헤친 마녀 앞에
당랑거철(螳螂拒轍), 당당하게
팔짱 끼고 서서
나 이제 떡갈나무 숲을 떠나겠소, 여길 떠나
꿈사냥꾼들과 낯선 사냥터에 새로운 발자국을 찍겠소,
호언장담 대들었다
알았다 이눔아, 하지만 이렇게나 쉽게 너무 일찍 설치다니!
흑발의 마녀가 억센 발길질로 나를 뻥 차는 대신 어찌나 힘껏 끌어안았던지
꿈꾸고 있지 않던 내 꿈의 골조가
무너질 지경
마녀는 내게 새 신발 여덟 켤레를 선물로 주었다
말마라 말도 마시라 그것은 한 시절 무성했던 떡갈나무 너른 잎이 엮어낸
바람의 구두
구름의 낙하산
언제 어디로 떠돌아다녀도 굽이 닳거나 밑창 해지는 일이 없는
떡갈나무 문장이 뚜렷한
여름의 진면목
떡갈나무를 꿰뚫어 알게 된 나는 나뭇가지마다
바람의 통로를 터주러 오늘도 편하게
구두끈 매고 문간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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