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너머 시

초밥을 먹으며 / 정한용

songpo 2019. 10. 14. 17:17



초밥을 먹으며

 

정한용

 

 

 

소식 없이 한 계절 보낸 뒤

아들을 만나 초밥을 먹는다.

생선살로 싼 밥을 고추냉이와 간장에 찍어 먹는다.

매콤한 공기가 콧속을 흔들자

오래 묵은 눈물이 스며 나온다.

내가 갔던 독일은 너무 멀고

내가 머물다 떠난 너의 마음도 너무 멀고

내가 애써 지우려 한 사람까지의 거리도 너무 멀다.

밥알에는 적당한 온기와 물기가 섞여

끼리끼리 착 달라붙어 있다

입안에서 우물우물 잘게 흩어진다.

몸을 잃은 생선도 제 살점이 씹히는 걸 마냥 지켜보고 있다.

우리가 잠시 나눈 의례와 기록도

언젠가 이렇게 산산이 부서져 내릴 것이다.

이 시간은 엷어졌다 언제 또 무의식으로 떠오를지

모른다,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새 접시가 다 비고, 나는 나의 길로

아들은 아들의 길로

밥은 밥의 길로, 생선은 생선의 길로

각자 제 살 곳을 향해 말없이 흩어진다.

겨울 접히고 봄이 펼쳐진다.

'시 너머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일명 서정시 / 나희덕  (0) 2019.10.20
네트 /고영민  (0) 2019.10.16
떡갈나무 마녀와 꿈사냥꾼/김영찬  (0) 2019.10.10
블라인드 /이은심  (0) 2019.10.05
나무와 양의 결혼식 /송찬호  (0) 2019.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