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밥을 먹으며
정한용
소식 없이 한 계절 보낸 뒤
아들을 만나 초밥을 먹는다.
생선살로 싼 밥을 고추냉이와 간장에 찍어 먹는다.
매콤한 공기가 콧속을 흔들자
오래 묵은 눈물이 스며 나온다.
내가 갔던 독일은 너무 멀고
내가 머물다 떠난 너의 마음도 너무 멀고
내가 애써 지우려 한 사람까지의 거리도 너무 멀다.
밥알에는 적당한 온기와 물기가 섞여
끼리끼리 착 달라붙어 있다
입안에서 우물우물 잘게 흩어진다.
몸을 잃은 생선도 제 살점이 씹히는 걸 마냥 지켜보고 있다.
우리가 잠시 나눈 의례와 기록도
언젠가 이렇게 산산이 부서져 내릴 것이다.
이 시간은 엷어졌다 언제 또 무의식으로 떠오를지
모른다,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새 접시가 다 비고, 나는 나의 길로
아들은 아들의 길로
밥은 밥의 길로, 생선은 생선의 길로
각자 제 살 곳을 향해 말없이 흩어진다.
겨울 접히고 봄이 펼쳐진다.
'시 너머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일명 서정시 / 나희덕 (0) | 2019.10.20 |
---|---|
네트 /고영민 (0) | 2019.10.16 |
떡갈나무 마녀와 꿈사냥꾼/김영찬 (0) | 2019.10.10 |
블라인드 /이은심 (0) | 2019.10.05 |
나무와 양의 결혼식 /송찬호 (0) | 2019.1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