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명 서정시*
- 나희덕
그들은 <서정시>라는 파일 속에 그를 가두었다
서정시마저 불온한 것으로 믿으려 했기에
파일에는 가령 이런 것들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머리카락 한줌
손톱 몇조각
한쪽 귀퉁이가 해진 손수건
체크무늬 재킷 한벌
낡은 가죽 가방과 몇권의 책
스푼과 포크
고치다 만 원고 뭉치
은테 안경과 초록색 안경집
침묵 한병
숲에서 주워온 나뭇잎 몇개
붕대에 남은 체취는 유리병에 밀봉되고
그를 이루던 모든 것이 <서정시> 속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의 서정시들과 함께
그들은 이런 것조차 기록해두었을 것이다
화단에 심은 알뿌리가 무엇인지
다른 나라에서 온 편지가 몇통인지
숲에서 지빠귀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옷자락에 잠든 나방 한마리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하루에 물을 몇통이나 길었는지
재스민차를 누구와 마셨는지
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대출받았는지
강의시간에 학생들과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지
저물 무렵 오솔길을 걷다가 왜 걸음을 멈추었는지
국경을 넘으며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이 사랑의 나날 중에 대체 무엇이 불온하단 말인가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그가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말을 가졌다는 것
마음의 뿌리를 돌보며 살았다는 것
자물쇠 고치는 노역에도
시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
파일명 <서정시>에서 풀려난
서정시들은 이제 햇빛을 받으며 고요히 반짝인다
그의 생애를 견뎌온 문장들 사이로
한 사람이 걸어나온다, 맨발로, 그림자조차 걸치지 않고
* Deckname <Lyrik>. 구동독 정보국이 시인 라이너 쿤쩨에 대해 수집한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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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를 ‘개인의 감정과 정서를 주관적으로 표현한 시’라고 정의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이 ‘주관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자유’이다. 나희덕 시인의 신작 시집 『파일명 서정시』에는 이러한 자유가 억압받고 통제되는 시기와 상황을 ‘서정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영국의 간섭에 맞서 미국의 독립을 주장하며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친 패트릭 헨리는 자유의 대척점으로 단순한 억압이나 부자유가 아닌 ‘죽음’을 상정하고 있다. 라이너 쿤쩨에 대한자료집 ‘Deckname<Lyrik>’을 제목으로 차용하고 있는 이 시집도 자유를 억압하는 죽음에 대한 기록이다. 그동안 생명의 충일감을 노래하던 시인도 진도 앞바다에서 생때같은 어린 학생들이 죽음을 당하자 망연자실해진다. 하지만 마음을 추스르고 아우슈비츠를, 위안부를, 세월호를, 그러니까 가장 고통스럽고 참혹하며 슬픈 죽음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산더미처럼 쌓인 채 썩어가는/ 안경들, 신발들, 머리카락들, 두개골들,/ 썩지 않는 고통의 연료들”(「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여기가 어디지요?/ 낯익은 능선과 돌담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고향집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들린 발꿈치로 동구에서 기다립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기다렸던 것처럼.”(「들린 발꿈치로」), “햇빛도 닿지 않는 저 깊은 바닥에 잠겨 있으면서도/ 끝까지 손을 풀지 않았던 아이들,/ 구명조끼의 끈을 잡고 죽음의 공포를 견뎠던 아이들,/ 아이들은 수학여행 중이었다/ 죽음을 배우기 위해 떠난 길이 되고 말았다”(「난파된 교실」)
이러한 시들은 주로 “눈동자들은, 어디로 갔을까”라는 제목의 2부에 수록되어 있다. 시인은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눈동자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발들은, 얼굴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라고, 전쟁과 폭력에 의해 조각난 육신, 해체되어 버린 몸뚱이를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눈동자’는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피카소는 스페인 내전을 고발한 〈게르니카〉라는 그림의 중앙에 전구 모양의 눈동자를 그려 넣었다. 이때 눈동자는 사건의 목격자이자 진실을 증언하는 증인의 역할을 하며, 침묵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와 비판의 의미도 갖는다. 시인이 참혹한 죽음에 대한 기록을 시작한 것도 ‘눈동자’ 때문일 것이다. 그 눈동자는 인간의 탐욕과 거짓, 무지로 인해 죄 없이 죽어간 모든 사람들의 눈동자이자 그것을 또렷이 바라보고 기록하려는 시인의 눈동자이기도 하다.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파일명 서정시」에서 권력자들이 두려움을 느끼고 파일 속에 가두려 한 곳도 바로 시인의 눈동자이다. 빛나는 눈동자에 대한 두려움이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감시와 통제를 하게 한다. 자유를 억압하려는 자들에겐 서정시‘마저’ “불온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사실 서정시‘야말로’ 불온한 것이다. 왜냐하면 서정시는 죽음의 반대편인 자유가 필요한 시이기 때문이다. 자유를 노래하는 시이기 때문이다. 서정시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연다는 점에서 라이너 쿤쩨가 한때 열쇠 수리공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그 고통을 견디고 마침내 “맨발로, 그림자조차 걸치지 않고” 걸어 나오는 시인의 모습은 ‘파일명 서정시’가 아닌 본연의, 거칠 것 없이 자유롭고 얽매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송은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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