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너머 시

달그림자에 사는 일 /김병호

songpo 2020. 9. 14. 16:18

달그림자에 사는 일 (1)

 

김병호

 

 

 

당신이 그랬듯이 꽃이 다 지고서야 봄을 알았지

 

싸리비로 꽃잎을 쓸면 겨우 지운 이름에 다시 얼룩이 지고

 

누가 오는지도 모른 채 하루내 기다리는 사람처럼

 

무릎을 안고 가만가만, 가만히 눈썹을 뜯어 하늘에 붙이지

 

그러면 쇠를 부리는 대장장이가 어디 있어 꽃니 자국 같은 섬광을 비춰주지

 

당신이 그랬듯이 봄은 다시 오지 않을 테지만 녹슨 철문 닫듯 그래도, 밤이 오면

 

나는 시치미 떼듯 번듯한 표정으로 초승달을 따다 이마에 붙이겠네

 

뒷짐을 진 채 궁리도 없이 안녕을 들여다보겠네

 

마음이 묶여 다리가 없는 나는 구름 너머의 빗소리를

 

약으로 들으며 오늘도 빚지는 일만 늘어가겠지만

 

 

 

아무렇게나 사랑이

 

 

 

크루아상처럼 접힌 어둠을 뒤적이면

새로 생긴 주저흔이 반짝거립니다

맡겨놓고 찾아가지 않는 푸들 같습니다

 

뒤꿈치에 붙인 반창고가 자꾸 밀립니다

모서리 없는 계단에서 미끄러진 슬리퍼 탓입니다

 

이런 날은 자면서도 발끝을 오므립니다

꿈에서도 말을 더듬습니다

 

문법이나 행간 없이도 이해되는 친절한 악몽입니다

꿈이 길지 않으니 내일쯤 당신이 당도하겠다 싶습니다

 

한쪽만 들리는 이어폰을 끼고 눈을 감으면 간신히 슬퍼집니다

거짓말을 할 때마다 혀를 씹는 버릇 탓입니다

 

속도 없이 커브를 도는 심야버스처럼 당신이 덜컹거립니다

 

제발, 내려주세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달래고 타일러도 소용이 없습니다

본래의 뜻과 당신이 멀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흐르지 않고

사랑이 어디인지 묻지도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