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너머 시

한양호일(漢陽好日) /서정주

songpo 2015. 3. 3. 19:56

한양호일(漢陽好日)

 

서정주(1915~2000)

 

 

 

열대여섯살짜리 소년이 작약(芍藥)꽃을 한아름 자전거(自轉車)뒤에다 실어끌고 이조(李朝)의 낡은 먹기와집 골목길을 지내가면서 연계(軟鷄)같은 소리로 꽃사라고 웨치오. 세계에서 제일 잘 물디려진 옥색(玉色)의 공기 속에 그 소리의 맥(脈)이 담기오. 뒤에서 꽃을 찾는 아주머니가 백지(白紙)의 창을 열고 꽃장수 꽃장수 일루와요 불러도 통 못알아듣고 꽃사려 꽃사려 소년은 그냥 열심히 웨치고만 가오. 먹기와집들이 다 끝나는 언덕 위에 올라서선 작약(芍藥)꽃 앞자리에 냉큼 올라타서 방울을 울리며 내달아 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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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기와집 처마들이 잇대인 서울 북촌 골목길에서 벌어진 일이겠다! 소년이 작약 꽃다발을 자전거 뒤에다 한 아름 싣고 꽃사려 꽃사려 외치며 지나간다. 골목에 퍼지는 소년 목소리는 어린 닭처럼 앳되나 그 기상은 구김살 없이 늠름하다. 소년은 어쩌자고 부르는 소리도 알아듣지 못하고 앞으로만 달리는 걸까. 하늘은 옥색이고 햇빛이 화창하니, 방울소리는 얼마나 명랑하게 공중에 파문을 지으며 퍼져나가겠는가! 그까짓 작약 꽃 한 다발 들여놓지 못한다고 무슨 대수이랴! 바라건대, 우리의 나날이 작약 꽃을 들일 만큼만 여유가 있는 그런 호일(好日)이면 딱 좋겠다.

 

 

장석주(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