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 우리 고향 마을에 처음 전기가 들어올 무렵
송찬호(1959~ )
마당가 분꽃들은 노랑 다홍 빨강 색색의 전기가 들어온다고 좋아하였다
울타리 오이 넝쿨은 5촉짜리 노란 오이꽃이나 많이 피웠으면 좋겠다고 했다
닭장 밑 두꺼비는 찌르르르 푸른 전류가 흐르는 여치나 넙죽넙죽 받아먹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가난한 우리 식구들, 늦은 저녁 날벌레 달려드는 전구 아래 둘러앉아 양푼 가득 삶은 감자라도 배불리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해 여름 드디어 장독대 옆 백일홍에도 전기가 들어왔다
이제 꽃이 바람에 꺾이거나 시들거나 하는 걱정은 겨우 덜게 되었다
궂은 날에도 꽃대궁에 스위치를 달아 백일홍을 껐다 켰다 할 수 있게 되었다
—시집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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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광학적 사막이다. 본디 밤에는 빛이 희박하다. 야행성 동물은 눈동자의 지름을 키우고 허공의 광자(光子)를 모아 어둠을 잘 보는 쪽으로 진화한다. 야행성 동물의 큰 수정체는 숫제 핏빛 불꽃이다. 반면 사람 눈은 어둠 속에서는 무용지물이다. 기어코 백열구가 나왔다. 대규모 농장들은 밤새 불을 밝혀 생체교란에 빠진 닭들이 더 많은 알을 낳게 하고, 인류는 한 시간이나 덜 잔다. 혜택이 고루 돌아간 것은 아닌 모양이다. 전기가 늦은 저녁 전구 아래 양푼 가득 삶은 감자라도 배불리 먹었으면 하는 사람들까지 행복하게 만들었다는 증거는 희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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