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너머 시

그림자 놀이 1 / 정진규

songpo 2015. 4. 8. 21:45

그림자놀이1 (외 2편)

 

 

정진규

 

 

 

 

왼쪽 눈이 고장 나기 시작하더니 오른쪽 눈이 턱없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관음(觀音) 안경을 갈아 끼웠다 새로운 보행을 시작한 징조다 내 두 손은 민첩해졌다 그림자놀이를 시작했다 그림자놀이 천수(千手)를 두 개의 벽에 비추기 시작했다 두 개의 벽을 설치해 놓았다 동영상이다 장차 천 개의 손들이 기대된다 이승의 벽과 저승의 벽을 내왕하기 시작했다 오른쪽 눈이 이승과 저승을 열었다 비로소 회사후소(繪事後素)다 우주 한 분이 하얗게 걸리셨어요

 

 

 

 

참음, 교활한

 

 

 

 

왜 참았을까 참고 참다가 사랑을 참아둔 여자에게 심장이 아픈 여자에게 병문안 전화를 걸고 나니 그렇게 시원했다 자유의 돌기가 온몸에 오소소 솟았다 큰 빚을 갚은 기분이어서 죄를 탕감한 느낌이어서 오늘 하루가 개운하게 저무는 저녁노을을 아주 좋은 색깔로 내가 칠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참았을까 참을 인(忍) 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실천이었을까 나는 결코 윤리적이지 못하다 그런 참음이 아니었다 참음이란 유보(留保)다 이런 미결이 이런 미수가 나는 왜 이렇게 좋을까 직전(直前)의 위기까지 가야만 왜 직성(直星)이 풀릴까 나를 부풀게 할까 단언하자면 내 참음의 질은 범죄의 참음, 교활한 도망침, 나는 그 맛을 즐겨왔다 꽃 피는 것들의 곁에서 둥근 우주로 부풀고 있는 것도 그러하다 죄를 짓고 섰다

 

 

 

 

환희라는 꽃

 

 

 

 

풀릴 때가 제일 위험하다 해동 때를 대비하라 제일 위험할 때가 환희의 시절이니라 큰 돌이 무작정 구른다 도처에 푸른 멍투성이다 너를 만날 때가 네가 다녀갈 때가 제일 위험하다 위험의 향기를 아느냐 벌써 초록 먼동이 번져오기 시작한다 풀내를 맡는 방식을 나는 안다 나는 물들 줄 안다 죽음의 암내가 풍긴다 상여 소리 넘어간다 봄은 날렵하게 죽음을 입력한다 화훼사전(花卉辭典)에도 없는 풀꽃, 환희라는 이름의 꽃, 너의 이름을 환희라 지었다 나는 너에게 입력되었다

 

 

 

 

—시집『우주 한 분이 하얗게 걸리셨어요』(201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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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규/ 1939년 경기도 안성 출생. 1964년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나팔 서정」가작으로 등단. 첫 시집『마른 수수깡의 평화』이후『有限의 빗장』『들판의 비인 집이로다』『매달려 있음의 세상』『비어있음의 충만을 위하여』『연필로 쓰기』『뼈에 대하여』『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몸詩』『알詩』『도둑이 다녀가셨다』『本色』『껍질』『공기는 내 사랑』『律呂集, 사물들의 큰언니』『무작정』『우주 한 분이 하얗게 걸리셨어요』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