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너머 시 281

드므/최연수

드므 /최연수 주술이 통하는 곳은 얼굴 신은 가장 잘 속아 넘어가는 것들로 이목구비를 만들엇다 어떤 사무친 마음 있는지 물거울 속 또렷한 얼굴이 중얼거린다 수피가 재빨리 표정을 지운다 어느 궁에서 본 드므 속엔 당황한 불이 있었다 슬며시 다가와 비추는 순간 말끄러미 올려다봤다는 화마 떠다니는 달에 황급히 얼굴을 벗어 걸어도 푸시시 불은 꺼졌다 얼마나 부끄러웠으면 자신을 꺼버려야만 했을까 놀란 걸음이 서둘러 빠져 나가고 잠시 고요한 파문만 남았을 것이다 불을 다스리는 건 냉수밖에 없어, 뜨거운 속을 다스려도 여전한 여울목 남은 화기가 약수 한 통 받아들고 오솔길을 내려간다 냉장고를 열면 방금 다녀간 갈증이 흔들리다 잦아들고 유리컵으로 옮긴 거울 속엔 여전히 얼굴이 화끈거린다

시 너머 시 2021.06.15

등불/류미야

등불 류미야 입김마저 쨍그렁, 깨질 듯한 밤입니다 수은주 영하 10도 한파 몰아친 세밑 별들의 풍찬노숙을 계절 속 바라봅니다 이 별이 글썽여 저 별 잠 못 이루는 다정한 그 풍경을 무어라 부를까요 저들 중 누구도 서로 밀어내지 않습니다 그렇게나 먼 데서 눈을 찡긋거리며 너 거기 있냐고, 나 여기 있다고, 품에서 빛거울을 꺼내 아는 시늉합니다 생각은 습관처럼 긍휼을 귀애하지만 마음이 마음처럼 순해지지 않을 때 어둠 끝 벼랑을 밝힌 별을 바라봅니다

시 너머 시 2021.06.14

정숙자 시인

정숙자 시인 김혜천 "저잣거리 향나무는 되지말자" 이 말은 시인의 품격이 담긴 그의 전언이다 스스로 틈을 낸 절벽에 뿌리 내리고 벼랑 같은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구도자 오직 작품만이 그가 견뎌내야 할 중력이다 가위질에 잘 적응하여 둥글게 부푼 도심 향나무 따위엔 눈길도 주지 않는다 살 에이는 외로움을 견디며 깊은 산속 가파른 절벽에서 자신이 뿌리내린 절벽에 끊임없이 균열을 내 무너뜨리고 또 다시 새로움을 향하여 도주하는 유목적 삶만이 사유의 추동이다 시력 33년, 수체화처럼 수려한 산문집과 스스로 결정판이라 여기는 시인의 9번 째 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은 숱한 시간 제 몸에 쌓은 서고와 주름을 헐어 피워낸 아픈 발화 "규범 언어를 위반하는 텍스트로 최고의 기쁨과 희열을 생산"(롤랑 바르트) 한..

시 너머 시 2021.06.04

나희덕의 「이 도시의 트럭들」 감상 / 곽재구

나희덕의 「이 도시의 트럭들」 감상 / 곽재구 이 도시의 트럭들 나희덕 돼지들은 이미 삶을 반납했다 움직일 공간이 없으면 움직일 생각도 사라지는지 분홍빛 살이 푸대자루처럼 포개져 있다 트럭에 실려 가는 돼지들은 당신에게 어떤 기억을 불러일으키는가 짝짓기 직전 개들의 표정과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들의 눈망울에서 당신은 어떤 비애를 읽어내는가 아니, 그 표정들은 당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이 도시의 트럭들은 너무 많이 싣고 너무 멀리 간다 엿가락처럼 휜 철근들과 케이지를 가득 채운 닭들과 위태롭게 쌓여 있는 양배추들과 금방이라도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원목들을 싣고 트럭들은 무엇을 실었는지도 잊은 채 달린다 커브를 돌 때마다 휘청, 죽음 쪽으로 쏟아지려는 것들이 있다 ⸺ 시집 『파일명 서정시』 2018. 11..

시 너머 시 2021.01.03

코로나 학번/ 류근

코로나 학번 류 근 재수를 하고서야 간신히 대학에 입학한 아들 아침마다 갈 곳이 없다 학교는 분명 거기쯤 있을 텐데 갈 데가 없다 입학식에 입으려고 작년부터 준비해 둔 양복 요즘 누가 입학식에 그런 걸 입느냐며 온갖 놀림에도 아랑곳없이 다려두었던 그 양복 옷장에서 한 번도 나온 적 없다 입학식도 없이 개강 첫날의 촌스러움도 없이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는 동안 학교 한 번 못 가보고도 대학생은 대학생 모니터 속 교수는 아들의 얼굴을 모르고 아들은 학교 가는 버스 노선을 모르고 나는 집에서 빈둥거리는 아들의 정체를 모르고 학교는 언제 문이 열릴지 모르고 바이러스는 언제 사람을 지나칠지 모르고 모르고 모르고 온통 모르고 이 자욱한 몽롱의 담장 너머 캠퍼스엔 꽃이 피고 여전히 등록금 고지서는 펄럭이고 아들은..

시 너머 시 2020.12.21

오분간/나희덕

오분간 이 꽃그늘 아래서 내 일생이 다 지나갈 것 같다. 기다리면서 서성거리면서 아니, 이미 다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기다리는 오분간 아카시아꽃 하얗게 흩날리는 이 그늘 아래서 어느새 나는 머리 희끗한 노파가 되고, 버스가 저 모퉁이를 돌아서 내 앞에 멈추면 여섯살배기가 뛰어내려 안기는 게 아니라 훤칠한 청년 하나 내게로 걸어올 것만 같다. 내가 늙은 만큼 그는 자라서 서로의 삶을 맞바꾼 듯 마주보겠지. 기다림 하나로도 깜박 지나가 버릴 生, 내가 늘 기다렸던 이 자리에 그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을 때쯤 너무 멀리 나가버린 그의 썰물을 향해 떨어지는 꽃잎, 또는 지나치는 버스를 향해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내 기다림을 완성하겠지. 중얼거리는 동안 꽃잎은 한 무더기 또 진다. 아, 저기 버스가 온다. ..

시 너머 시 2020.12.20

창에 널린 이불/최정례

창에 널린 이불 아파트 창에 널린 햇살에 적나라한 솜이불 애국도 매국도 아닌 태극기도 일장기도 성조기도 아닌 목화솜 이불인지 폴리에스터 요깔개인지 이념도 아니고 사상도 아닌 우리의 생활 이미 비난받은 우리의 내부인 것 같은 내장을 꺼내 뒤집어놓은 것처럼 입 꾹 다문 일 가구의 내면을 햇살에 내어 말리고 있는 작은 창 가난한 방의 두툼한 저 무념무상 ............................................................................................................................................................................................................

시 너머 시 2020.12.20

김현승의 「아버지의 마음」 감상 / 허연

김현승의 「아버지의 마음」 감상 / 허연 아버지의 마음 김현승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바깥은 요란해도 아버지는 어린것들에게는 울타리가 된다. 양심을 지키라고 낮은 음성으로 가르친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들이다. 가장 화려한 사람들은 그 화려함으로 외로움을 배우게 된다. ⸺《김현승전집 詩》 253쪽 .................................................................................

시 너머 시 2020.12.20

부리가 샛노란 말똥가리 두어 마리 데리고(외 2편)/김륭

부리가 샛노란 말똥가리 두어 마리 데리고(외 2편) 김 륭 내일의 날씨가 우산을 들고 뛰어올 때까지 빗소리를 심었다 화분 가득 끓는다. 아직 태어나지 못한 말이 있어서, 누구십니까? 나는, 내가 만들지 않은 사람 나는, 끝이 난 다음에 시작되는 이야기 나는, 시작되지도 않고 끝이 나는 이야기 나는, 빗방울처럼 움켜쥔 배꼽으로 세상을 내려쳐보는 이야기여서, 그렇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마음은 찢어지는 게 찢어지지 않는 것보다 낫다* 천변 어딘가에 그림자를 숨긴 새들은 인간의 노래에서 도망 나온 글자들을 쪼아댔다 벌레보다 못한 말, 서서 잘 수 없는 말로 꿴 책이라니 엄마, 엄마는 왜 벌써부터 누워있는 거야 부리가 샛노란 말똥가리 두어 마리 데리고 죽은 듯 가만히 누워서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떠내려오거나 이..

시 너머 시 2020.12.18

안도현의 「그릇」 감상 / 곽재구

안도현의 「그릇」 감상 / 곽재구 그릇 안도현 1 사기그릇 같은데 백 년은 족히 넘었을 거라는 그릇을 하나 얻었다 국을 말아 밥상에 올릴 수도 없어서 둘레에 가만 입술을 대 보았다 나는 둘레를 얻었고 그릇은 나를 얻었다 2 그릇에는 자잘한 빗금들이 서로 내통하듯 뻗어 있었다 빗금 사이에는 때가 끼어 있었다 빗금의 때가 그릇의 내부를 껴안고 있었다 버릴 수 없는 내 허물이 나라는 그릇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금이 가 있었는데 나는 멀쩡한 것처럼 행세했다 .............................................................................................................................................

시 너머 시 2020.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