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너머 시 281

김경후의 「입술」 감상 / 김행숙

김경후의 「입술」 감상 / 김행숙 입술 김경후 입술은 온몸의 피가 몰린 절벽일 뿐 백만 겹 주름진 절벽일 뿐 그러나 나의 입술은 지느러미 네게 가는 말들로 백만 겹 주름진 지느러미 네게 닿고 싶다고 네게만 닿고 싶다고 이야기하지 내가 나의 입술만을 사랑하는 동안 노을 끝자락 강바닥에 끌리는 소리 네가 아니라 네게 가는 나의 말들만 사랑하는 동안 네게 닿지 못한 말들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소리 검은 수의 갈아입는 노을의 검은 숨소리 피가 말이 될 수 없을 때 입술은 온몸의 피가 몰린 절벽일 뿐 백만 겹 주름진 절벽일 뿐 ⸺시집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 (2017년) ................................................................................

시 너머 시 2020.10.17

허연의 「절창」 감상 / 김정수

허연의 「절창」 감상 / 김정수 절창 허 연(1966~ ) 마신 물이 다 눈물이 되는 것은 아니므로. 늦은 지하철 안에서 깊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휠체어에 앉은 남자가 포유류가 낼 수 있는 가장 깊은 소리로 신음하고 있었다. 경전 같은 소리였다. 절박하고 깊은… 태초의 소리였다. 삶을 관통한 어떤 소리가 있다면 저것일까. 일순 부끄러웠다. 나는 신음할 일이 없었거나 신음을 감추었거나. 신음 한번 제대로 못 냈거나… 그렇게 살았던 것이었다. 나는 완성이 아니었구나. 내게 절창은 없었다. 이제 내 삶을 뒤흔들지 않은 것들에게 붙여줄 이름은 없다. 내게 와서 나를 흔들지 않은 것들은 모두 무명이다. 나를 흔들지 않은 것들을 위해선 노래하지 않겠다. 적어도 이 생엔. .........................

시 너머 시 2020.10.11

서안나의 「백 톤의 질문」 감상 / 박성현

서안나의 「백 톤의 질문」 감상 / 박성현 백 톤의 질문 서안나 뒤돌아보면 가을이었다 소주가 달았다 내가 버린 구름들 생강나무 꽃처럼 눈이 매웠다 고백이란 나와 부딪치는 것 심장 근처에 불이 켜질 때 그렇게 인간의 저녁이 온다 불탄 씨앗 같은 나를 흙 속에 파묻던 밤 죄많은 손을 씻으면 거픔 속으로 사라지는 두 손은 슬프다 어떤 생은 어떤 눈빛으로 커튼을 닫고 밥을 먹고 슬픔을 물리치나 깨진 중국 인형의 눈동자 속에서 울고 싶은 자들이 운다 죽은 꽃이 죽은 꽃을 밀고 나오는 부딪치는 밤이었다 돌아누우면 물결이던 애월 ............................................................................................................

시 너머 시 2020.09.15

류성훈의 「틀니」 감상 / 장석남

류성훈의 「틀니」 감상 / 장석남 틀니 류성훈(1981~ ) 이건 어떻게 할까요 뼛가루 속에서 얼룩처럼 쇳조각이 오른다 버리는 일에 익숙한 우리는 일렬로 선다 검댕이 묻지 않게 멀리서 고개만 끄덕이는 상속세와 증여세를 계산하던 남은 틀니들이 더운 국을 퍼 담고 목에 육수가 흐르고 넥타이를 벗고 깃에 풀을 먹이듯 점심을 먹는데 어떻게 할까요, 는 어떻게 할까 웃을 타이밍 찾아 그을린 이승의 곰탕들이 저승의 곰탕을 씹는다 ....................................................................................................................................................................

시 너머 시 2020.09.14

달그림자에 사는 일 /김병호

달그림자에 사는 일 (외 1편) 김병호 당신이 그랬듯이 꽃이 다 지고서야 봄을 알았지 싸리비로 꽃잎을 쓸면 겨우 지운 이름에 다시 얼룩이 지고 누가 오는지도 모른 채 하루내 기다리는 사람처럼 무릎을 안고 가만가만, 가만히 눈썹을 뜯어 하늘에 붙이지 그러면 쇠를 부리는 대장장이가 어디 있어 꽃니 자국 같은 섬광을 비춰주지 당신이 그랬듯이 봄은 다시 오지 않을 테지만 녹슨 철문 닫듯 그래도, 밤이 오면 나는 시치미 떼듯 번듯한 표정으로 초승달을 따다 이마에 붙이겠네 뒷짐을 진 채 궁리도 없이 안녕을 들여다보겠네 마음이 묶여 다리가 없는 나는 구름 너머의 빗소리를 약으로 들으며 오늘도 빚지는 일만 늘어가겠지만 아무렇게나 사랑이 크루아상처럼 접힌 어둠을 뒤적이면 새로 생긴 주저흔이 반짝거립니다 맡겨놓고 찾아가지..

시 너머 시 2020.09.14

동역학

동역학 정숙자 하나둘 우물이 사라졌다 마을과 마을에서 ‘깊이’가 밀려난 것이다 우물물 고이던 시간 속에선 두레박이 내려간 만큼 물 긷는 이의 이마에도 등불이 자라곤 했다 꾸준히 달이 깎이고 태양과 구름과 별들이 광속을 풀어 맑고 따뜻한 그 물맛이 하늘의 뜻임을 알게도 했다 하지만, 속도전에 뛰어든 마을과 마을에서 우물은 오래가지 못했다 노고를 담보하지 않아도 좋은 상수도가 깔리자 물 따위는 쉽게⸺ 쉽게⸺ 채우고 버릴 수 있는 값싼 거래로 변질/전환되었다 엔트로피의 상자가 활짝 열린 것이다 가뭄에도 사랑을 지켰던 우물 속의 새 언제 스쳐도 깨끗하기만 했던 우물물 소리 그런 신뢰와 높이를 지닌, 옛사람, 무명 옷깃 어디서 다시 만날까 그리고는 우물가에 집 짓고 살까 ⸻월간 《시인동네》 2020년 7월호 --..

시 너머 시 2020.07.25

개의 밤이 깊어지고/ 강성은

개의 밤이 깊어지고 강성은 개가 코를 곤다 울면서 잠꼬대를 한다 사람의 꿈을 꾸고 있나 보다 개의 꿈속의 사람은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개가 되는 꿈을 꾸고 울면서 잠꼬대를 하는데 깨울 수가 없다 어떤 별에서 나는 곰팡이로 살고 있었다 죽은 건 아니었지만 곰팡이로서 살아 있다는 것이 슬퍼서 엉엉 울었는데 아무도 깨울 수가 없었다 개는 나를 바라보는데 깨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

시 너머 시 2020.05.13

이성복의 「서시(序詩)」 감상 / 채상우

이성복의 「서시(序詩)」 감상 / 채상우 서시(序詩) 이성복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 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

시 너머 시 2020.05.09

아, 그랬습니까 /금은돌

아, 그랬습니까 금은돌 내 사람이 될 수 없을 때 당신은 참 좋은 분이라 말해 드립니다. 이불 안에 품을 수 없는 행성일 때 다소 쓸쓸한 구두코 주름과 마주칠 때 두툼하고 낮은 언덕 같은 목소리에 기대어 보고 싶을 때 같은 버스 안에서 기침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 치마를 먼저 걷어 올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 것만으로 내 칼을 무디게 해 줄 수 있는 호흡이어서 막 내린 공항버스에서 다른 여자의 짐을 내려 줄 때 비집고 올라오는 질투가 좋아라. 괜스레 옆에 있는 친구에게 말을 걸며 먼지 날리도록 웃어보는 것이 좋아라. 행성 근처에 맴도는 것이 좋아라. 불가능, 이라는 낱말로 차오르는 넉넉한 막막함이 좋아라. 구두코 주름진 그늘 아랫자락에서 비행기 좌석 앞, 뒤, 옆에서 부서지는 먼지를 만질 수 있는 것..

시 너머 시 2020.04.29

무구함과 소보로 / 임지은

임지은 선생님은 지은이를 기억합니다 나는 지은이가 아니지만, 지은이일 수도 있습니다 얼굴 속에 얼굴을 넣고 다녔습니다 쉬는 시간에 아이들은 매점엘 갑니다 나는 지은이를 들키고 싶지 않아 책상에 엎드려 자는 척을 합니다 눈을 뜨자 밥상이 차려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엄마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 지은이를 지우고 다른 얼굴을 답니다 콩자반을 집어 먹으며 내가 몇 개인지 셉니다 끝까지 세기 어려워 다시 처음부터 셌을 뿐인데 무한히 늘어난 검은 눈동자들이 한꺼번에 나를 쳐다봅니다 욕실로 달려가 비누로 얼굴을 문지릅니다 표정은 자꾸 손끝에서 미끄러지고 나는 나를 몇 번이나 놓칠 뻔했지만 얼굴들을 잘 씻어 서랍 안에 넣어둡니다 수건처럼 잘 개켜진 옆면들, 내가 너인 순간들 함부로 뒤집어 벗어 놓은 이 얼굴들을 뭐라고 ..

시 너머 시 2020.04.14